Ratatouille / 라따뚜이 (2007)

우연히 만난다면 분홍빛의 말랑말랑한 코를 한번 만져 봐도 되는지 물어보고 싶은 레미(패튼 오스왈트)는 타고난 후각을 가진 쥐이자 천부적인 요리사다. 그러나 그의 능력은 동료 쥐들이 발견한 음식 쓰레기들에 쥐약이 들어있는지 아닌지 감별하는 데 쓰일 뿐이다. 어느 날 이 조그만 녀석은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파리의 유명 레스토랑 구스토에 숨어들어가 요리사의 꿈을 키운다. 물론 자신을 보고 기겁을 할 사람들에 대비해 링귀니(루 로마노)라는 청년을 앞세운 채. 요리에 소질이 없는 링귀니는 어머니의 유언에 의해 파리의 유명 레스토랑에 청소부로 들어가지만 레미의 도움을 받아 우연히 맛 좋은 스프를 만들게 되고, 죽은 구스토의 뒤를 이어 식당을 물려받으려 했던 수석 주방장 스키너는 여러모로 미심쩍은 그를 못 마땅히 여긴다. 과연 링귀니와 레미는 그들의 은밀한 파트너쉽을 들키지 않고 유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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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요리를 할 수 있다Anyone can cook!" 불결함의 대명사인 쥐 한 마리가 구스토의 이 글귀에 감명 받아 펼치는 요리의 향연은 은근히 감동적이고, 포근하고, 따뜻한 웃음을 안겨준다. 구스토는 후덕한 모습으로 레미의 상상 속에 남아 그를 요리사의 길로 인도해주며, 레미의 놀라운 감각은 어수룩한 링귀니의 비장의 무기가 된다. 개인의 능력을 발휘하기에 태생의 불리함과 신분의 차이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영화의 주제는 언뜻 학문의 테두리에 갇혀 개성 없는 예술품을 양산하는 우리 사회를 바라보게 한다. 한정된 교육의 기회가 곧 주류예술계로의 편입을 의미하고 그것이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 됨으로써 정작 그들 밖의 개성 있고 뛰어난 재능의 예술가들을 불편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우리현실의 편협한 태도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허울 좋은 간판과 권력, 그리고 학력이 능력에 우선하는 이 비정상적인 사회는 아쉽지만 레미 같은 재능 있는 예술가를 키워낼 여력이 없다. 영화의 메시지는 충분히 공감할 만큼 올바르지만, 한편으론 3D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들이 아니라 그 순수한 이상 때문에 비현실적으로도 보인다.



예술의 가능성에 대한 이상을 좇는 <라따뚜이>에는 <인크레더블>의 신드롬처럼 선천적 재능의 부재자가 등장한다. 타고난 재능을 물려받지 못한 이들은 신드롬처럼 지구를 위협하는 악당이 되거나 스키너(이언 홈)처럼 본인의 사리사욕에 집착하는 인물이 된다. 그래서 누가 봐도 재능 있는 감독임이 분명한 브래드 버드의 메시지는 때론 나 같은 비(非) 천부적 자질의 당사자들에게 일정부분 자괴감을 느끼게도 만든다.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인크레더블 가족의 능력이나 레미의 재능에 견줄만한 타고난 글솜씨가 없는데 어떡하냐고요.


<라따뚜이>는 예술의 열린 가능성과 함께 대중을 향한 예술작품의 전달자인 평론가의 의무도 조심스럽게 일러둔다. 평론가란 창작이라는 고통의 과정을 거친 예술가의 결과물을 불과 몇 줄의 글로 쉬이 난도질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가 아니라, 언제나 대중에 의해 받아들여짐을 겪어야 하는 예술가의 새로운 감각을 찾아내고 그로 인해 혹시 모를 대중의 낯섦을 이해로 탈바꿈시켜야 하는 자리인 것이다. 얼마 전 영화잡지에서 읽었던 샤를 테송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전 세계의 좋은 영화들을 발굴해 독자들에게 가이드라인이 돼는” 것이 영화저널의 사명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아마도 요리나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은 거의 모든 평론매체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까? ‘누구든’ 예술을 할 수 있지만 혹 ‘아무나’ 평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인크레더블>에서 예술혼에 불타는(!) 디자이너 에드나 모드(개인적으론 그녀 때문에 영화를 몇 번씩 보았을 정도)를 연기했던 브래드 버드는 <라따뚜이>에서도 목소리를 들려준다. 까다로운 평론가 안톤 이고(피터 오툴)에게 쩔쩔매며 식당 구스토의 재기를 알리는 앰브리스타가 바로 그다.

* 이미지출처 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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