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리뷰] 너구리들의 사생결단 - 平成狸合戰ぽんぽこ /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1994)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는 일본, 도쿄인근의 타마(多摩)언덕. 이곳에서는 지금 인간들의 거주지역을 확장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다. 이른바 ‘타마뉴타운’ 개발계획이 바로 그것이다. 이 지역의 원래 주인인 너구리들은 자신들의 생활터전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급기야 그들의 전통의 비기인 변신술을 이용해 인간과의 대결을 선포하는데...


다카하타 이사오의 너구리들은 결국 변신술을 꺼내들고야 말았다. 요즘 한창 잘 나가는 오토봇이나 디셉티콘의 변신도 그들 앞에서는 한낱 어린아이같은 재롱에 불과할 것이다. 인간은 물론이고 여우나 토끼같은 동물, 50인분의 밥이라도 안칠 수 있는 커다란 솥, 앙증맞은 불상, 다양한 요괴로도 변신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을 목격한다면 무시무시한 메가트론도 지구를 떠날 마음을 먹게 되지 않을까. 다만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인간으로 변신할 때에는 수시로 강장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눈 밑의 짙은 다크서클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한국전쟁 이후 경제적으로 고도성장을 이룬 일본의 60년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폼포코너구리대작전”(이하 “폼포코”)은 우리에게 자연과 환경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다시 생각해 볼 것을 권유하는 동시에 너구리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너구리들의 삶은 그대로 인간사회의 축소판이다. 인간들의 개발계획을 둘러싼 의견들도 하나로 모으지 못한 채 저마다의 주장을 해대느라 바쁘고, 그날그날의 성공에만 희희낙락하며 축포를 터뜨리는 것도 예삿일, 결국 각자의 길을 떠나는 결말마저도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을 그대로 너구리의 것으로 옮겨온 느낌이다. 인간에 대해 강경파였던 곤타는 결국 끝까지 무모한 투쟁을 하다 숨을 거두고, 정신적 지주로 모셔왔던 999살의 장로 하게타누키는 심혈을 기울인 요괴대작전이 실패하자 4평짜리 음낭으로 보물선을 만들어 생각도 목적도 없는 길을 떠난다.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쇼우키치를 비롯 변신술을 익힌 너구리들은 인간으로 변신해 그들 틈에서 살아가는 삶을 택하는 반면 변신할 수 없는 너구리들은 숲을 빼앗긴 채 그대로 위험에 노출되어 살 수 밖에 없다.

“폼포코”는 언뜻 변신너구리들의 판타지세계를 다루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다카하타 이사오의 현실인식이 녹아들어있다. 특히 변신술을 익히지 못해 먹이를 찾아 위험한 도로를 건너야 하는 너구리들은 마치 우리사회의 소외된 계층을 보는 듯 하다. 그들까지 포용하려 노력했던 너구리 쇼우키치는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다. 영화의 마지막, 퇴근길의 쇼우키치는 마을에서 먹이를 찾아 돌아가는 너구리를 발견하고 쫓아간다. 따라간 그곳에서 그가 오랜 친구인 폰키치와 만났을 때 관객들의 마음에는 반가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여있을 것이다. 변신술을 익히지 못해 어려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폰키치들도 그렇지만, 현대사회를 이루는 톱니바퀴가 되어 익명의 누군가로 살 수 밖에 없는 쇼우키치의 앞날도 우리와 꼭 닮아있기 때문이다. 엔딩테마인 "いつでも誰かが"가 흥겨우면서도 쓸쓸하게 들리는 것은 그 때문일까. 언젠가 길 가던 누군가가, 인간으로의 삶에 허덕여 눈 밑 깊게 새겨진 다크서클을 가진 너구리로 생각되거든 기꺼이 홍삼음료 하나 권해보는 것은 어떨런지.


* 이미지출처 bestani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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