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ce / 원스 (2006) - 음악이 채워주는 빈자리



때론 내가 감상하고 있는 영화가 나에게 건네주는 끈들을 영원히 부여잡고 싶을 때가 있다. 이것은 영화를 본다는 행위가 스크린에 펼쳐지는 영화와 나 자신간의 일대 일의 대화이며, 내가 스스로 그 대화를 끝내고 싶지 않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영화라는 대상과 관객이라는 주체, 혹은 그 반대의 경계가 사라지는 ‘몰아(沒我)’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쨌든 나는 그런 경험을 안겨주는 영화들에 있어서 그 끝을 만나고 싶지 않지만, 영화는 때가 되면 어김없이 엔딩 크레딧을 보여줘야 한다. 이 아쉬움이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고,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그 한 순간이 더 소중하고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이니까. 하지만 어차피 영화는 ‘환상’의 체험이 아니던가. 영화가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올 때 나는 그 ‘환상’에 뛰어들어, ‘나 자신을 잊을’ 준비가 언제든 되어 있다. 그리고 <원스>가 그런 경우의 영화다.

 


사실 <원스>의 외양은 그리 매끄럽지 않다. 주연 배우들은 전문 배우들이 아니며, 당연히 화면 어디에도 이 영화에 일정 이상의 자본이 투입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인 같은 것은 없다. 영화의 편집 또한 각 씬 들이 단절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던져 주는데, 그렇다고 개별 에피소드들이 <원스>의 스토리가 인간의 사고능력을 시험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해주지도 않는다. 즉 편집이 얼기설기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 사실 자체가 이야기의 흐름을 해칠 수도 없다는 얘기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과정들이 <원스>의 스토리의 전부다. 영화는 여기에 서로간의 감정의 교류를 보일 듯 말 듯 슬쩍슬쩍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원스>는 이렇듯 다소 미숙해 보이거나, 또는 따로 떨어져 보이는 구성요소들을 한 가지 방법으로 봉합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음악이라는 마법이다.


재미있는 것은 언뜻 매끄럽지 않아 보이는 이 영화의 외양이 음악의 힘을 받으면서부터 눈부시리만치 빛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글렌 한사드와 마르케타 이글로바가 들려주는 그들의 음악은 마치 영화에 불어넣어진 환상의 숨결처럼 들리며, 이 숨결이 <원스>의 소박한 이야기에 놀라운 힘을 보태는 것이다. <원스>에서 음악은 곧 주인공들간의 대화이자, 영화와 관객간의 소통의 끈이고, 우리가 이 끈을 기꺼이 잡아당기는 순간 <원스>는 우리에게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원스>는 음악이라는 요소 위에 이야기라는 부차적인 장식이 얹힌 영화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음악들은 길거리 뮤지션인 남자와 외로운 이민자인 여자의 손과 입을 통해 비로소 등장하는 주인공이라 해도 좋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스>에 대한 호부(好否)가 갈리는 지점은 역시 음악이다. 하지만 좋은 음악을 구별해내는 촉각이 사람마다 다르더라도, 이 영화의 노래들이 가진 아름다운 멜로디와 그 순수한(또는 순수해 보이는) 의도에 심취하거나 심취할 관객들은 여전히 많아 보인다. 이쯤에서 영화의 소박한 생김새는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한다. 만약 이 두 남녀의 이야기가 숨막힐 듯 촘촘한 이음새로 연결되어 있거나, 또는 모든 것이 완결성을 갖는 해피엔드로 귀결돼야 하는 강박을 염두에 두었다면 <원스>의 빈 공간에 노래들이 설 자리는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호감을 밑바탕에 두고 말하건대, 이 영화의 영화적 허술함은 오로지 음악으로 채워질 수 있으며, 실제로 관객의 가슴을 건드리는 영화의 노래들은 음악 이외의 다른 요소들과 거의 동등하거나 혹은 더욱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원스>의 음악에 호감을 가지지 못하면 영화 자체에도 그리 큰 인상을 얻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글렌 한사드(와 마르케타 이글로바)의 노래들은 묘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저 우리가 살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만남 중 어느 하나와 비슷할 수도 있는 이들의 만남이, 영화 속 그 자체로 기분 좋은 설렘을 일으키거나, 이 두 등장인물의 영화 밖 실제 사랑과 연계되어 소박하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은, 분명 영화와 그 노래들과의 상호작용 때문이다. <원스>의 주인공이자 당당히 영화의 한 공간을 차지하는 곡들, 즉 두 사람이 처음 호흡을 맞추는 ‘Falling Slowly’에서부터, 데모 CD의 첫 트랙을 차지하는 ‘When Your Mind's Made Up’을 지나, 그리고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수놓는 ‘Once’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노래는 영화의 주된 감성을 지배한다. 이런 노래들이 우리에게 풍부한 감수성을 전해주는 이유는 오히려 소박하게 주조된 영화의 외형 덕분이며, 반대로 영화 속 ‘그녀’가 ‘그’에게 전하는 짧은 체코어가 영화가 끝난 후 더한 감동을 전해주는 것도 바로 이 사운드트랙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것이다.


영화를 구성하는 각 요소들이 저마다 최대한의 에너지를 뿜어주는 영화들도 그 나름대로 즐거움을 선사해주지만, 이렇게 영화의 빈 공간을 감성의 선율로 채워주는 영화들이 때론 더한 울림을 던져줄 때도 있다. 그 빈 공간이 영화적인 것을 의미하든, 아니면 찬바람이 휑한 현실의 우리네 가슴을 뜻하든 말이다. 정말이다. 이런 영화라면 언제든 나는 그 ‘환상’ 속으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있다. 종종 끝내기 싫은 즐거운 대화나 만남처럼, 마지막을 맞기가 못내 아쉬운 그런 ‘환상’.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마도 이것이 끝맺기 싫은 이야기를 끝낸 후 맞이하는 여운이기에 더욱 환상적인 것일 터이다. 이것을 증명하듯 <원스>는 영화가 종료된 후 찾아오는 현실의 빈 자리를 채우며 공명하고 있다. 마치 영화의 빈 자리를 노래가 채우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아직도 내 귓가엔 ‘Falling Slowly’의 멜로디가 맴돌고 있다.

* 이미지출처 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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