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담 (2007) -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기담'

1979년 10월, 어느 의대의 노교수(전무송)가 1941년의 뇌수술 장면을 보여주며 강의를 하고 있다. 교수의 모습은 나이 탓인지 어딘가 초췌해 보인다. 교수는 하나뿐인 딸과 저녁을 약속한 후, 옛날 자신이 근무했으나 지금은 폐허가 된 병원건물을 찾는다. 교수는 그곳에서 자신의 좋지 않은 과거를 직접 마주하듯, 조금은 긴장된 모습이다. 때는 저녁, 딸과 식사를 하는 노교수. 하지만 분명 아버지와 딸 두 명뿐인 이 집에 다른 누군가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그리고 이 저녁식사가 딸과의 마지막 만남이 된다. 교수의 두 아내가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모두 명을 달리한 데 이어 이제는 딸과도 이별이다. 교수는 그 동안 자신을 괴롭혀왔던 37년 전의 과거를 떠올린다. 스스로 인과관계를 설명할 순 없지만, 자신의 불행은 그 악몽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노교수는 알고 있다. 그가 근무했던 1942년의 안생병원에선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병원에서 벌어진 세가지 사건을 이어놓은 영화 <기담>은 그 사건들을 직접 겪은 어느 노교수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기담>의 외양은 인구에 떠도는 괴담(怪談)류의 모습을 하고 있다. 병원이라는 특수한 장소는 인간의 온갖 감정과 상태들이 스며들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인간의 궁극적인 공포인 죽음과 일상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상처,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되는 슬픔과 비명이 공존하는 장소이자, 한편으론 회복과 치유로부터 희망과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인간사의 다양한 지점들을 압축해 놓은 듯, 병원이라는 장소의 특수성은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래서인지 ‘무서운 이야기’들 또한 특히나 이런 곳에 모여든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안생병원의 풍경은 숨가쁜 이미지의 병원이라는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게, 어딘지 모르게 평화로워 보이고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곳이다. 이런 장소에 일제시대라는 시대적 배경이 어우러진 <기담>의 이야기 자체는 사실 그다지 새롭지 않다. 결과적으론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공포영화의 영원한 테마인 ‘원한’이 <기담>에서도 반복되어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람이 사람에게 가지는 몇 가지 감정이 <기담>에는 덧붙여져 있다. 죽은 자를 그리워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미련’의 정서와 그로부터 더 나아간 ‘집착’의 감정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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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담>은 영화의 이런 주된 정서를 단순히 공포영화라는 장르적 특성에 매몰되지 않게 표현해 내고 있다. 동양적 호러물의 전범이 되어버린 듯한 ‘원귀’의 갑작스런 등장 등이 <기담>의 영화 곳곳에 배치되어 있긴 하지만, 이 영화의 주목적이 관객을 놀래는 데에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언뜻 따로 떨어져 있는 듯한 세 가지 이야기는 서로 교차하는 장면들로 서로 상관관계를 가지며 스토리를 따라가는 관객의 여정을 즐겁게 만들어주거나, 각 에피소드들이 공포를 위한 장치들과 묘하게 어울리는 아련히 아름다운 화면들을 종종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기담>이 아픔과 희망이 교차하는 병원의 이미지를 각기 무서움과 아름다움으로 대체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기담>이 충분히 무서운 공포영화가 아니더라도 관객이 담아갈 수 있는 정서의 폭은 훨씬 넓다. 그간의 공포물들이 피 칠갑을 한 모습으로 오로지 관객들의 정서적 안정을 방해하는데 주력했다면, <기담>은 여기에 안정된 연출이 바탕이 된 미려한 이미지들을 삽입함으로써 공포영화로부터 끌어내는 감정을 한 계단 더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록 이 영화가 우울함을 주된 정서로 품고 있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환한 빛을 머금고 있는 것 같은 감상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기담>의 이야기를 펼쳐 놓은 노교수의 마지막 모습이 쓸쓸해 보이면서도 그리 슬프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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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출처 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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