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지 아니한가 (2007) - 캐릭터에 모든 것을 걸어볼까?

정윤철의 <말아톤>은, 괜한 신파조로 감정의 깊이를 흐트러뜨리지도 않고, 호들갑스런 장치들 없이, 그저 조용한 어조로 담담하게 이야기를 훑어 내려가면서도 관객의 큰 호응을 끌어냈던 영화였다. 물론 이 영화가 가진 ‘실화’(부분적으로나마)라는 간판이 영화의 이슈화에 크게 공헌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감독 정윤철의, 장편영화 신인감독답지 않은 매끈한 연출력을 폄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그것은 <말아톤> 이후 비슷한 류의 실화를 토대로 완성한 다른 영화들과 이 영화를 비교해 보면 확연히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말아톤>이 그 ‘실화’라는 보이지 않는 도움의 손길로 인해 일정이상의 덕을 본 이상, 본인이 ‘능력있는’ 감독으로서 온전히 자립할 수 있는 기회는 바로 그의 두 번째 장편 작에 달려있는 셈이었다. 정윤철의 두 번째 장편영화 <좋지 아니한가>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의 분위기와 등장인물들의 면면으로 보아 다분히 만화적인 이 영화는, <말아톤>으로 그의 팬이 되었던 관객들에겐 꽤 당혹스런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좋지 아니한가> 또한 가족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말아톤>이 자폐아의 성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주변인들의 갈등과 화합을 다뤘듯이, <좋지 아니한가> 역시 개성 강한 가족 구성원들이 저마다 흩어지다, 결국엔 다시금 울타리 안으로 모여 서로를 인정하게 된다는, 엇비슷한 테마를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말아톤>이 자폐아라는 강력한 구심점으로 영화적으로 보다 쉽게 그 주제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면, <좋지 아니한가>야말로 감독의 능력 그대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장으로 쓰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허나 이쯤에서 김태용의 <가족의 탄생>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가족의 탄생>이야말로 가족의 의미를 보다 확장하고, 기존의 전통적이고 수구적인 가족의 가치관을 해체하는데 더없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좋지 아니한가>의 결정적인 줄기라 할 수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부터 앞의 영화와 비슷한 테마를 이끌어내는 것(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자체가,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더 효과적이었던 저 영화와 비교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의 생김새와 상관없이 약간 한발 늦은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좋지 아니한가>가 더 집중하는 것은 이야기나 주제 자체보다 캐릭터다. 등장인물의 무표정과 사건의 생뚱맞음을 주무기로, 영화는 이 ‘콩가루’ 집안의 ‘유별남’을 강조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몇몇 캐릭터와 그 배우들은,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할 정도로 불필요해 보인다(등장인물 모두가 상상외의 흐름으로 얽혀있던 <가족의 탄생>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결국엔 ‘이러나 저러나, 혈육이든 아니든, 우리는 가족’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이 많은 인물들을 상상하고 만들어내는 과정을 상상해 보며, 감독 정윤철의 부담감(특히 작품의 오리지널리티에 대한)이 관객의 마음으로까지 전해져 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세 번째 장편 영화가 톱스타들을 기용했으면서도 약간의 기대감과, 약간의 우려감을 동시에 가져다 주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말아톤>과 <좋지 아니한가>의 모양새를 동시에 기억해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이미지출처 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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