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Q / 존 큐 (2002) - 미국의 현실? 아니, 어쩌면 우리의 미래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사정은 넉넉지 않아도 존 퀸시 아치볼드(덴젤 워싱턴)의 가족은 행복하다. 언제나 남편을 믿어주는 아내와 바디빌더가 꿈인 어린 아들이 집안을 환히 비춰주기 때문이다. 이 단란한 가정의 상황은 야구경기 도중 아들의 갑작스런 심장이상만 없었더라면, 적어도 불행의 냄새가 풍겨오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건강해 보이던 아들은 쓰러졌는데 믿었던 보험은 보장이 되질 않고, 국가의 보조는 받을 길이 없으며, 가장인 존 큐의 능력으론 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그 막대한 치료비용을 마련할 방도가 없다. 절벽에 홀로 선 아버지는 아들을 살려내기 위해 최후의 수단을 꺼내 든다. 합법적 불평등 앞에,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힘들어하는 아들의 모습뿐이다. 존 큐는 총 한 자루를 쥔 채 병원을 ‘접수’한다.


영화 <존 큐>는 이 드라마의 강한 축인 부성애를 온갖 감동적인 대사들로 극대화 시키고, 주인공의 범죄를 정당화 시키는 상황과 캐릭터를 곳곳에 배치해 놓는다. 또 결정적인 순간에 아들에게 이식 가능한 심장을 ‘기계장치에 탄 신’의 손에 들려 지상으로 운반해내면서, 스스로 해피엔드로 가는 길목을 매끄럽게 닦아 놓는다.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헐리웃 영화의 ‘대책 없는 낙관주의’에 한 치의 오차 없이 들어맞는 것이 영화 <존 큐>다. 그러나 영화가 어떻고 말고를 떠나서, 아들을 살려내기 위해 온갖 방도를 짜내어도 결국엔 총을 드는 방법 외엔 없었을 존 큐의 범죄가 지금 이 시점에 달리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토대가 된 미국의 잿빛 현실이, 바다 건너 우리의 미래와 결코 멀리 떨어진 얘기가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느 한 분야 빠짐없이 경쟁의 논리로 이해하시는 그분께서 푸른 기와집에 입성하신 지금, 선진국의 발톱 밑에라도 들어가자며 건강보험체계를 바꾸실 궁리를 하고 계신단다. 그것도 각종 공기업을 민영화시키는 작업의 일환으로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과정의 미래가 이미 이 한편의 영화, <존 큐>에서 아들을 살릴 궁리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주인공을 스크린 밖 현실로 끄집어 낼 수도 있다는 것.


치료자가 환자를 내칠수록 더욱 재정을 풍부하게 유지할 수 있는(그래서 공공연히 그러기를 권장하는) 이 구멍 난 보험체계는 이미 미국 내에서 문제로 제기된 지 오래다. 지금 미대선 후보들조차 이 의료보험을 커다란 쟁점으로 내건 이유는 이것이 자국민들의 건강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고 있으며, 수많은 유권자들이 이 같은 상황인식에 동의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근데 이제 와서 국가재정의 낭비를 막는다는 이유와 기관의 효율성을 빌미로 그들의 그것을 벤치마크 한다고? 대상의 허물까지도 이렇게까지 감쌀 수 있다니, 이른바 초강대국의 겉모습에 너무 도취되어 있는 것 아닐까. 아니면 벌써부터 민간보험회사들의 ‘콩고물’에 침을 흘리고 있는지도. 국민의 건강은 수치로 환산되어 돈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고, 분배주의에 대한 성장주의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희생되어도 좋을 것도 아니다. 물론 그들에게는 마치 매트릭스에 흘러 내리는 기호들처럼, 우리의 건강이라는 담보가 쏟아지는 돈다발로 보이겠지만 말이다.

국민의 건강을 자본의 한 가운데에 던져버리는 과정에서 피 터지는 것은 존 큐와 그의 아들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며, 게걸스럽게 그 이익들을 나누는 것은 저 돈줄을 쥐고 있는 보험회사들과 그들의 로비를 받는 정치인들뿐이다. 하긴 이럴 땐 보험회사가 어떤 방법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며 보장의 의무를 요리조리 피해가든 간에 환자 스스로 넉넉한 돈만 쥐고 있으면 되긴 한다. 한편으론 뭘 하든지 경제가 우선시되는 이 희망에 찬 미래엔 우리 모두 부자가 될 것이라 자위해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떤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더라도 ‘그’가 바라는, 경쟁에 최적화된 사회에서 모두가 1등급이 될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자명하고, 그렇다면 웬만큼 벌지 않을 바에야 ‘큰 병’ 하나면 파산이다. 병을 미리 대비한다는 것은 우습지만 어쨌든 우리의 불투명한 미래가 안전한 수준에 이르도록 바란다면, 개발독재 시절 땅값 올라가는 속도나 한 ‘큐’에 로또 수십 개가 당첨될 금액 정도로 벌어야 한다. 실제로 이것이 미국의 어두운 현실이고 ‘지금으로선’ 한국의 답답한 미래다.


존 큐의 용맹한(?) 행위가 헐리웃다운 깨끗한 결말을 낳았더라도 이 가슴 먹먹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마도 이대로라면 이 조그만 땅덩어리 곳곳에 존 큐처럼 눈물을 삼키며 총을 꺼내 들어야 하는 아버지들이 출몰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랴, 한국은 미국처럼 총을 구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현실의 인질들은 그토록 다정다감하지 않을뿐더러, 한 명을 구하고자 많은 이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행위는 논리적, 윤리적으로도 용납이 안 되는 것을. 결국 현실의 존 큐는 가스총이나 꺼내 들다 용감한 시민들에 의해 제지될 것이며, 그의 아들은 심장이 부풀어오르다 끝내 숨질 것이다. 나에겐 지금 이 순간 영화 <존 큐>를, 결말을 뻔히 예상할 수 있는데다 그저 거짓말 같은 이야기라 칭할 용기가 없다. 현실이 어두울수록 거짓말 같은 꿈을 쫓는 횟수도 많아지는 법이고, 그 행위 자체로 비난 받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어쩌면 <존 큐>는 우리의 어두운 미래를 ‘그나마’ 달래줄 밝은 환상이 될 수도 있다. 아니면 혹시 누가 아는가, <존 큐>에서 아들의 새 심장이 적절한 시기에 발견되듯이, ‘기계신’께서 ‘그분’께 우리의 미래를 밝게 비춰줄 최고의 해결책을 넌지시 던져주고 가실는지. 그저 간절히 바랄 뿐이다.

* 이미지출처 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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