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 - 신학과 이성이 충돌하는 중세 유럽의 세계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세기에 언어라는 강력한 도구로 재건축한 중세의 모습은 현재와 다른 패러다임 속을 걷는 미지의 세계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 시기의 철학, 신학적 쟁점들을 <장미의 이름>에 쏟아 놓았다. 그것도 미스터리라는 가장 강력한 매혹의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작가의 상상력이 고스란히 독자의 뇌리에 남을 수 있는 효능을 발휘하도록 말이다. 멜크의 아드소와 그의 스승인 배스커빌의 윌리엄은 14세기 이탈리아의 어느 수도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통해, 이렇게 중세의 이야기 한 조각을 우리에게 전한다.

철학이 신학에 종속되어 인간의 이성을 새장에 가둬두었던 <장미의 이름> 속 중세는, 불변의 진리가 인간의 손에 의해 확정된 시대였다. 성서의 해석을 두고 논쟁과 반목을 일삼던 세력들이, 실은 세속의 권력을 신의 이름으로 획득하기 위해 그런 행위를 거듭했음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황제와 교황간의 세력다툼이며, 기독교 안 종파간의 밥그릇 싸움이다. 이단의 꼬리표는 신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의 손에 의해 붙여지며, 이것은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무리들을 지상에서 추방하는 과정의 일종이었다. 신의 구원이나 죄의 사함 같은 거룩한 의미는 거기에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용하는 것은 ‘공포’라는 이름의 도구다.

 


<장미의 이름>에서 이단 심문관인 베르나르 기가 수도원의 살인사건과 그 용의자들의 이단 여부를 심문하는 과정은 중세의 시대적 폭력성을 느끼게 해준다. 심문관으로서 베르나르 기의 무기는 범죄 사실을 구체화하는 논리와 추리, 혹은 그 증거가 아니라, 신체적 고통과 죽음으로의 길을 슬쩍슬쩍 보여주는 공포의 주입이다. 이것이 움베르토 에코가 그리는 중세의 단면이며, 호르헤 노인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신에 대한 두려움을 현실에 반영한 것이다.

종교의 기초는 절대자에 대한 두려움이다. 호르헤가 웃음의 효과를 멀리하려 한 이유는 그것이 혹 신에 대한 비웃음, 그래서 신의 권능과 존재 자체를 회의하는 태도로까지 번질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움베르토 에코는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 윌리엄을 통해, 호르헤의 광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여준다. 절대적 진리에 대한 잘못된 태도와 과도한 집착은 인간을 스스로 망가뜨린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내면에서 밖으로 표출될 때, 주변을 어둡게 만들기 시작한다. <장미의 이름>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고, 거대한 지식의 보고인 수도원의 장서관을 불태웠듯 말이다.

윌리엄과 호르헤의 마지막 대결은 사실 두 가지 형태의 인간, 즉 이성적 인간과 종교적 인간의 대립이다. 재미있는 것은 윌리엄이 탐닉하는 지식의 출발점이, 기독교가 지배하는 중세 이전의 고대 그리스에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 세계의 패러다임은 돌고 도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이성이 칭송되었던 고대 그리스 시대를 지나, 이 지구를 신의 영역 안에 두고 스스로 사고하기를 포기했던 중세, 그리고 다시 계몽의 시대를 거쳐 과학의 격전지가 되어버린 지금의 세상. 이성의 힘이 끝없이 펼쳐지리라 낙관하는 현재를 지나, 다시금 절대자의 손안으로 들어가길 갈망하는 인간의 모습이 언제쯤 나타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세상도 중세의 메커니즘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디어의 일방적인 보도, 즉 사실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진리’를 무방비 상태에서 끝없이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것은 마치 절대자를 자칭하는 권력의 맨 꼭대기를 통해 흘러내리는 성서처럼 작용한다. 이 시대의 진리는 ‘힘의 균형’이다. 그것이 흔들릴 때마다 절대자는 움직이고, 그의 목소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대중의 귀를 현혹한다. 그 핵심도구는 여전히 ‘공포’이며, 그것은 암묵적인 정치적 압력과 실제적인 전쟁으로 구체화된다. 신의 이름 아래 있던 중세의 유럽은, 힘의 균형 아래의 지금의 세계로 자리바꿈한 것이다.

아마도 에코가 <장미의 이름>으로 이루고자 한 것이 이런 공상의 단계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말했듯 저자 스스로 해석하는 작품은 큰 의미가 없다. 작품이 창작자를 떠난 이후엔 그 해석은 철저히 독자의 몫이 된다. 노년의 아드소의 회한에 찬 목소리로 들려주는 <장미의 이름>이 무척 흥미진진한 이유는, 연쇄살인의 범인을 찾아 나서는 여정의 흥분과 현시대의 신의 얼굴을 동시에 떠올리는 나의 공상이 함께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수도원의 사람들을 죽음에의 파멸로 몰고 가는 호르헤의 광신이 윌리엄에 의해 그 실체를 드러내듯, 우리도 이성의 잠을 깨우고 세계를 또렷한 눈으로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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