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그램 / 21 Grams

방 안엔 함께 하룻밤을 보내고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여자와 먼저 일어나 담배를 물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아이들을 데리고 식당에 온 아빠는 두 딸과 귀여운 실랑이를 벌인다. 한 여자가 상처를 치유하는 어느 모임에서 딸의 출생과 남편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십자가가 걸린 교회에서 한 사나이가 세상에 불만 가득한 얼굴의 다른 젊은이를 교화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남자가 옆 침대에서 죽어가고 있는 환자들을 쳐다본다. 그는 죽음을 상상한다. 낙태를 경험한 듯한 여인이 남편의 아이를 가지기 위해 의사와 상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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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무슨 관계에 놓여있는지 알 수 없는 이 등장인물들은 영화 안에서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에 흩어져있다. <21그램>은 매우 불친절한 영화다. 이 영화는 시간의 순서를 따라 사건을 배열하지 않으며 당연히 공간의 연결에도 관심이 없다. 마치 퍼즐조각처럼 시간을 흩트려 놓은 채 임의로 펼쳐놓은 것 같다. 인물들은 바로 전 장면에서 깊은 관계에 있다가도 다음 장면에서 서로 모르는 채 지나친다. 앞의 장면을 기억하고 언젠가 다시 나올 지점들을 찾아내 서로 연결하는 것은 완전히 보는 이들의 몫이다. 그러나 매우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21그램>의 이야기 방식은 확실히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하지만 관객은 등장인물간의 연관성을 따라잡거나 사건의 순서를 배열하는데 집중하다가도 어느새 산산이 부서져 파편처럼 흩뿌려진 영화 속 인물들의 영혼과 마주하게 된다. <21그램>이 묘한 느낌을 가져다 주는 지점이 바로 여긴데,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서사의 조립보다는 시간의 흐름을 무시한 채 갑자기 튀어나오는 매 장면의 무거움에 더 주목하게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21그램>은 관객에게 친절하지 않은 영화이기도 하지만, 우리 가슴 한 켠을 답답하게 만들며 고통스럽게 만드는 영화이기도 하다. ‘21그램’이 상징하는 영혼의 무게, 즉 죽음의 무게는 역설적으로 영화 안에선 측정하기 힘들만큼 무겁게 느껴진다. 죽음으로 얽힌 등장인물들의 운명이 서서히 드러날수록 그 무거움은 커져 영화를 다 볼 무렵엔 지쳐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21그램>의 인물들은 마치 거미줄이라는 거대하고 끈적한 운명에 사로잡힌 힘없는 벌레들 같다. 그들을 서로 끌어당기는 매개체는 탄생과 그 끝이 맞닿아 있는 죽음이다. 심장이상으로 죽음에 임박한 폴(숀 펜)은 크리스티나(나오미 왓츠)의 남편이 사망하면서 남긴 심장을 받아 새로운 삶을 맞이한다. 폴의 아내 메리(샬롯 갱스부르)는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이를 갖고 싶어한다. 이 모든 것은 새로운 탄생의 이야기이면서도 역시 꺼져가는 생명들과 연관되어 있다. 폴의 심장이식은 다른 한 남자의 죽음과, 메리의 새 아이는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낙태한 경험과 연결된다. 종교에 몰두하며 전과자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잭(베네치오 델 토로)의 행동 또한 새로운 삶을 향한 재탄생의 욕망을 의미하나, 그 역시 의도치 않은 사고로 누군가를 죽음의 길로 이끈다. 그래서 이들의 삶과 죽음 사이에는 증오와 미련의 감정이 뒤섞여있다. 여기에 등장인물간의 관계가 조금씩 밝혀지면서 용서와 구원의 메시지를 끌어낼 발판 또한 마련되지만, 영화는 그 어떤 지점에서도 스스로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영화의 끝까지 시간의 순서를 무시한 채 서로 연결되지 않는 순간의 감정들을 던져놓는다. 이것을 정리하고 ‘21그램’이 상징하는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 역시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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