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 / Babel

이냐리투의 영화를 보는 것은 누군가의 황폐해진 심리를 들여다보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런 경험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지난 아픔을 안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거나 혹은 영화에서 실시간으로 그런 역경과 마주치게 된다. 영화 <바벨>에서 지구상의 다른 공간에서 동시간에 발생하는 사건들은 서로 희미한 끈으로 연결되어있다. 각기 사건들의 인과관계를 들여다보기 위해선 현미경을 이용해야만 하는 <바벨>의 에피소드들은 마치 나비효과처럼 출발점의 작은 행위가 거대한 폭풍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닮아있다. 모로코와 일본, 그리고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지역이라는 영화 속 장소들은 각 공간간의 거리만큼이나 서로 단절되어 있지만, 인간사를 고난의 연속이라 부를만한 몇 가지 감정들을 공유하고 있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영화를 통해 하고 싶었던 얘기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나 싶다. 아무 인과관계 없어 보이는 너와 나의 삶은 눈치 채지 못할 만큼 가는 선으로 이어져 있는데, 우리가 이것을 부르는 이름이 같다는 것. 즉 그것이 세상으로부터 느끼는 소외와 고통의 실마리이며, 우리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결국은 같은 삶의 무게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바벨>은 감독의 전작인 <21그램>에 비해 비교적 순차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른다. 전작이 영화 속 뒤섞인 시간으로부터 호기심을 유발했다면 <바벨>은 서로 다른 공간에 놓여진 등장인물들이 무슨 배경 안에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가 관심을 끈다. 이 영화는 그래서 한편으론 공간이 더 중요해 보인다. 예를 들어 영화의 배경 중 하나인 도쿄의 경우에는 그 자체로 또 다른 하나의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란한 네온사인과 끊이지 않는 음악의 비트가 도시를 활기차게 장식하는 동안, 말을 하지 못하는 치에코(키쿠치 린코)의 내면은 점점 더 어두운 외로움 속으로 침잠해간다. 마치 이 거대한 도시의 화려한 겉모습과 그 건조한 실상을 대조해서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속 다른 장소들도 마찬가지로 미국과 멕시코 국경지역의 황량한 사막은 의도하지 않게 미국을 떠나야만 하는 아멜리아(아드리안나 바라자)의 허무한 인생을 드러내는 것 같다. 그때, 그 순간에, 그곳에서 삶의 굴곡과 마주치게 되는 주인공들은 모두 바로 그들 뒤에 있는 배경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다.

 


영화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갈수록 등장인물들은 절망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하지만, 관객은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동아줄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점에서 <바벨>은 <21그램>과 닮아있다. 그러나 <바벨>에 내려진 동아줄은 <21그램>에서의 그것보다 튼튼해 보인다. <바벨>은 용서와 치유의 손길을 절망의 순간에 내민다. 최악의 상황을 맞닥트린 주인공들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결코 절망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비록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더라도 생이 계속되는 한, 하나의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삶의 동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감독은 그의 전작처럼 끝까지 지켜보기 힘든 상황들을 영화 안에 쏟아 넣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을 견뎌내고 나면 아리긴 하지만 적어도 앞을 내다볼 용기는 우리 손에 쥐어줄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단 하나 안쓰러운 것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한 줄기 안도의 빛을 얻게 되는 다른 세 인물군에 비해 모로코의 작은 가정은 끝내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된다는 결말이다. 인과관계를 따지기가 억지스럽긴 해도, 결국 이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된 야스지로(야쿠쇼 코지)의 총 한 자루보다, 삶이 고달픈 어느 모로코 소년의 실수에 더 큰 책임이 지워진 것 같아 조금 불편했달까. 왜 그들은 끝내 절망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을까. 영화가 이로써 인간의 힘으론 어쩔 수 없는 삶의 아이러니에 확인도장을 찍으려 했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겠지만.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