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 레이스 / Death Race

<데스 레이스>는 흥미로운 설정으로 영화의 시작을 알린다. 미국 경제가 몰락한 2012년, 실업률은 최고치에 이르고 범죄율은 증가한다. 교도소는 모두 민영화되어 이익을 좇기 바쁘다. 그 중 한 교도소는 죄수들간의 죽음의 격투를 생중계하여 돈을 번다. 그러나 자극에 만성이 된 시청자들은 곧 싫증을 느끼고, 교도소들은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죄수들을 활용하여 더 폭력적인 프로그램을 찾아낸다. 그것은 파괴와 스피드, 그리고 죽음을 소재로 한 ‘죽음의 경주’. 죽을 때까지 서로를 공격하여 최종적으로 레이스에서 승리하는 것이 게임의 룰이다. 여기에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여성 네비게이터(역시 여성죄수들)를 포함하면 그야말로 자극적인 소재의 완벽한 집대성. ‘죽음의 경주’는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본능을 활성화시키는 최고의 프로그램이 된다. <데스 레이스>의 오프닝 시퀀스는 이런 간략한 영화설정과 함께 마치 심장을 두드리는듯한 자동차 엔진의 힘찬 움직임을 통해 영화 전반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관객은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데스 레이스>가 별다른 우회 없이 차량을 이용한 액션으로 곧장 나아가리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이 영화의 분위기를 미리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요소는 하나 더 있다. 바로 감독의 이름. 폴 W.S. 앤더슨의 영화들은 마치 영화와 비디오게임과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태어난듯하다. 게임 원작을 토대로 한 그의 다른 영화들은 물론이고 폴 바르텔의 원작영화를 리메이크한 <데스 레이스> 또한 그러하다. 사실 특정 아이템들을 습득해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통로를 뚫을 수 있는 죽음의 경주 자체가 불특정 비디오게임의 복사판이다. 여기에 과격한 살해무기로 돌변한 차량들에 의해 인간의 신체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산산조각 나는 장면은, 인간이 아니라 철저히 파괴의 대상이 된 게임 속 적 캐릭터를 하나씩 처치할 때마다 전해지는 게임패드의 진동을 떠올리게 만든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내려는 노력을 최대한 자제한 듯한 영화의 줄거리 또한 어찌 보면 차량을 동원한 열혈 액션을 강조하는데 일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 <데스 레이스>는 자신에게 있어서 장면의 앞뒤사정과 사건의 인과관계 따위는 조금도 중요치 않다고 퉁명스레 이야기한다.

 


그래서인지 근육이 덕지덕지 붙은 레이싱카들의 불타는 격투에 슬슬 싫증을 느낄 때가 되면 관객이 영화에서 느꼈던 매력도 자연스레 사라지고 만다. 자극에 대한 더 큰 자극, 그리고 그것에 대한 또 한번의 면역은 비단 영화 속 ‘죽음의 경주’ 프로그램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 <데스 레이스> 자체에 대해서도 똑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신선도가 떨어지고 집중이 힘들어지는 것의 원인은 역시 앞서 언급했듯 좋은 이야기의 부재다. 그렇다고 생뚱맞게 걸작의 향기를 머금어달라는 무리한 주문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스토리상의 주요부분들을 너무나 예측 가능하게 만들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을 성토하는 것뿐이랄까. 영화가 변형된 자동차 경주를 다루며 스스로 누가 이길지를 가늠하는 동안, 관객이 참여하는 내용상의 승부(이를 테면 누가 주인공을 함정에 빠뜨린 주범인가 따위의 물음)는 일찌감치 결정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온갖 남성적인 요소들로 넘쳐나는 영화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고, 주인공의 네비게이터이자 홍일점, 케이스 역의 나탈리 마르티네즈를 보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다. 허나 영화의 길지 않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스턴트 장면들은 모두 접한 중반부 이후부터의 영화에 몰입하기 힘들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 관객은 영화 속에서 실시간으로 ‘죽음의 경주’를 관람하는 시청자들과 얼마간 일심동체가 되었다가도, 자극에 시들해질 때쯤 프로그램에서 나와 다시금 영화전체를 바라보는 관객이 된다. <데스 레이스>의 관객이 ‘죽음의 경주’의 시청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살이 찢기고 피가 튀는 현실을 잔인한 웃음을 흘려가며 보고 있지만, 우리는 이것이 목적을 위해 조직된 그럴듯한 가상임을 안다는 점. 그렇다면 액션에만 의존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영화의 이야기가 영화 속 제이슨 스테이덤의 잘 준비된 등 근육처럼만 좀더 세밀하게 짜였더라면 훨씬 재미있는 오락물을 볼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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