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 博士の愛した数式

어느 고등학교의 첫 수학시간. 루트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수학선생이 왜 자신이 이 수학기호로 불리게 되었는지 학생들에게 설명한다. 이야기는 가정부로 일하며 홀로 자신을 길렀던 어머니로부터 시작된다. 교코는 사고로 기억을 잃은 어느 수학박사의 집안일을 맡게 된다. 그녀는 박사를 돌보는 그의 형수로부터 몇 가지 규칙과 간략한 집안사정을 전해 듣는다. 박사는 교통사고로 인해 기억력 장애를 얻었다. 그의 기억은 80분간 유지될 뿐으로 그 이후엔 이전의 일을 모두 잊고 만다. 이 때문에 교코가 오기 전의 가정부들은 모두 오래 일을 하지 못하고 그만둔 것이다. 교코와의 첫 만남에서 박사는 뜬금없이 그녀의 신발사이즈를 묻는다. 24라 대답하는 교코와 그것은 4의 계승이라 설명하는 박사. 현관 앞에서의 첫만남은 전화번호의 문답과 설명으로 이어지며 이것이 둘 간의 첫인사이자 매일의 대화가 된다.


영화의 주 등장인물은 박사와 가정부 교코, 박사와 같은 사고를 겪은 후 맨션을 운영하며 그를 돌보아주는 형수, 그리고 교코의 아들로 이후 수학선생이 되는 루트, 이 네 사람이 전부다. 영화는 수업 중인 수학교사 루트가 학생들에게 박사와 어머니의 사연을 통해 수학 속 개념들을 설명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회상장면으로 보여지는 박사와 어머니의 이야기는 대부분 숫자에 대한 둘간의 담화로 채워져 있는데, 삶의 작은 부분에서 서로간의 연결점이 되어 나타나는 수의 신비로움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박사는 세상의 진리를 담고 있는 숫자를 찾아내 타인과 대화한다. 80분간의 기억에 갇혀버린 박사에게 숫자란 이를테면 일종의 소통의 도구인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인연을 맺게 된 이들의 일상은 그다지 큰 위험 없이 흘러간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는 등장인물들의 절체절명의 위기 같은 것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기억력장애 외에 큰 고비 없어 보이는 박사의 삶을 바라보다 보면, 갇혀버린 기억 안에서 숫자를 통해 주위와 대화하려는 그의 의지가 희미한 비감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장애를 곁에서 지켜보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해버린 전임 가정부들과 다르게 박사와의 대화를 유지해나가는 교코의 노력이 따뜻하게 다가오는 순간도 이때부터다. 여기에 박사와 그의 형수 사이에 말 못할 사연이 있음이 짐작되면서 영화는 소통과 단절을 반복하는 사람들간의 관계 하나하나가 얼마나 개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불의의 사고는 누군가를 사랑했던 개인의 기억을 사라지게 함과 동시에 그와 세상과의 연결점 또한 끊어버리고 만다. 관계의 단절은 개인을 외로움이라는 이름의 섬에 고립시킨다. 그러나 이 무인도에 찾아온 가정부 교코는 소통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의 따뜻한 배려는 박사로 하여금 현실의 끈을 붙잡을 수 있게 도와주고 이는 다시 박사를 통해 소년시절의 루트에게 잊을 수 없는 영향을 준다. 그리고 영화에서 이 모든 일이 가능하도록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 바로 숫자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러닝타임 내내 호들갑스런 장치 없이도 관객의 마음을 쥐고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영화를 통해 환상의 세계를 체험하거나 영웅의 활약상을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순간이지만, 가끔은 인간사회 속의 쓸쓸한 공허함을 진심으로 채워주려는 시도를 보는 것이 좋은 경험이 되기도 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마치 좋은 인생수업을 듣고 난 것 같은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그런 진심이 느껴지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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