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하긴 새삼스레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의 매력 없는 스토리를 부여잡고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도 조금 생뚱맞은 일이 될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김지운의 전작들이 엄청난 흡인력을 가진 줄거리를 보여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그의 영화를 좋아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국적에 가까운 영화 속 분위기에 매혹되었기 때문이지 결코 놀라운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니다. 웃음 속에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조용한 가족>의 산장, 현실과 격리된 듯 환상의 이미지를 품고 있는 <장화, 홍련>의 별장, <달콤한 인생>의 차갑고 세련된 도시의 밤거리. 김지운 영화의 세계는 이들이 관객을 끌어들이는 힘으로만 본다면 꼭 판타지를 그리지 않더라도 영화가 굳이 현실의 충실한 반영이 될 필요는 없음을 증명한다. 그가 그려내는 세상은 어느 곳, 어느 지점이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다. 단지 그 이미지가 선사하는 독특한 내음을 맡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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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감독의 성향은 일제시대의 만주 벌판이라는 <놈놈놈>의 배경이 현실보다는 환상 속의 무대에 보다 가까울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꼭 특정 장르와 연결 짓지 않더라도 감독은 이 새로운 장소를 끌어온 것 그 자체로 영화가 일정 이상의 흡인력을 갖길 원했을 것이다. 풀을 찾아 보기 힘든 황량한 광야에서 말발굽 소리와 총소리가 교차하는 순간을 한국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본다는 것은 분명 새로운 경험이니까. 한마디로 <놈놈놈>은 이 신선한 배경에 적당한 양념만 첨가해도 그럴듯해 보일 수 있다. 영화는 그 방편으로 마카로니 웨스턴의 고전에서 본떠온 캐릭터들을 삽입한다. 잘생긴 놈 두 놈에 웃긴 놈 하나로 이루어진 이 흥미로운 조합에 스크린에 펼쳐질 시각적인 청량함을 덧붙이면 <놈놈놈>이 다가가고자 한 목표지점이 어디인지 보인다. 넓은 평야를 시원스레 말 타고 달리다 심심하면 총 쏘고 지루하면 웃기고 하면 된다. 뭐, 구태여 그럴듯한 이야기까지 필요 있겠나.


그런데 과연 이 캐릭터들은 영화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드넓은 만주벌판에서의 총질에 별 흥미를 못 느끼는 관객들은 세 주인공들로부터 그 보상을 받아내야만 한다. 영화의 이야기조차 그다지 다가오지 않는 상황이라면 최고의 스타들이 연기하는 인물들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세 사람의 앙상블이 잘 맞물려 있다기 보다는 어딘가 공허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굳이 원인들간의 경중을 재본다면 배우들의 연기보다는 영화의 짜임새 자체에 더 무게가 쏠리겠지만 어쨌든 일차적인 느낌은 이렇다. 제일 기대가 되었던 ‘나쁜 놈’ 박창이(이병헌)는 하는 짓과 달리 얼굴이 너무 선해 보이거나 때론 그 지독한 악행조차도 자신의 본성을 속이는 위악처럼 보인다. 사실상 영화의 주인공인 ‘이상한 놈’ 윤태구(송강호)는 평상시 상황에 별 필요 없어 보이는 엉뚱한 개그를 하다가도 은근슬쩍 자신이 진정한 카리스마의 주인공임을 드러내는데, 그게 꽤 뜬금없이 이루어져 쉽게 설득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좋은 놈’ 박도원(정우성)은 딱히 좋아 보이지도 않는데다 캐릭터를 지탱하는 장면들이 너무 옅어 영화 속 한 장면을 제외하면 그 존재감마저 미비하게 느껴진다. 이럴 바에야 인물들의 성격은 최대한 단순하게, 또 선명하게 그려놓고, 차라리 시각적 스펙터클에 더욱 집중하는 편이 영화의 매력상승에 더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놈놈놈>에는 과연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것일까 생각이 드는 불필요한 장면들이 자주 배치되어있어서,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새 캐릭터는 영화에 섞이지 않은 채 스크린 밖으로 붕 뜨고 만다. 영화 속 이들의 앞날에 대한 관심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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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다 보니 영화의 목적은 희미해지고 중반 이후, 특히 영화의 절정인 후반 벌판 추격씬에서의 지루함을 견디기 힘들어진다. 사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박도원과 윤태구가 손을 잡고 박창이 일당과 암시장에서 총격씬을 벌이는 영화중반부의 장면이다. 아니 그것보다 좋은 놈 박도원이 가장 빛을 발한 부분이라고 하는 편이 옳겠다. 어차피 스토리나 캐릭터 구축에 소홀한 이 영화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활극으로서의 재미라면 박도원이 로프를 잡고 긴 다리를 펼치며 하늘을 날아 ‘원샷원킬’로 적을 해치우는 이 시퀀스야 말로 시원시원함의 절정이다. 이 장면을 통해 정우성은 못된 척을 해도 선한 눈빛을 지울 수 없었던 이병헌이나 별로 웃기지도 않는 개그를 열심히 시도하느라 안쓰러운 송강호보다는 적어도 확실한 장면 하나는 얻은 셈이다. 아니면 색깔 없는 캐릭터를 어렵사리 끌고 간 배우의 수고에 대한 명확한 보상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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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 당신이 진정한 챔피언...


다 본 후에도 관객으로서 별 감흥이 없었던 <놈놈놈>은 왠지 감독 김지운의 과시욕이 엿보이는 영화다. 하긴 장르를 넘나드는 전작들을 통해 소시민적이면서도 엉뚱한 코미디에서부터 기름기 좔좔 흐르는 럭셔리한 때깔까지 모두 선보였던 그다. 그런 그가 <놈놈놈>으로 한국영화시장에서는 보기 힘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냈다는 쾌감을 스스로 즐긴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놈놈놈>은 어째 일반 관객보다는 영화관계자들이 더 열광할 영화 같다. 비록 새로운 재미는 없어도 세 명의 스타배우를 기용해 세심히 연출된 액션장면이 비슷한 취향의 제작자들로부터 질투 어린 경쟁심을 불러 일으킬 테고, 말 위에서 멋지게 총을 겨누는 배우들의 모습은 남자배우들이 선망하는 캐릭터 그 자체가 될 테니까. 감독이 <놈놈놈>으로 성취한 게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좋은 장르영화를 보기 힘든 이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주변 영화인들에게 묘한 희망을 심어줬다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한국영화산업 전반에 끼치는 영향과는 다른 성질의 것일지라도 말이다. 영화의 흥행으로 <놈놈놈>의 이러한 영향력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그것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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