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은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난다. 뜻하지 않은 아기의 모습과 아내의 위독함에 충격을 받은 벤자민의 아버지는 크기만은 아직 아기인 그를 어느 양로원 계단에 버려둔 채 발길을 돌린다. 그런 그를 양로원에서 일하는 퀴니(태라지 P. 헨슨)가 발견한다.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이 모여있는 이곳. 태어날 때부터 죽음에 가까워 보인 벤자민에게 어쩐지 어울리는 장소 같다. 퀴니의 따뜻한 보살핌과 나이 들어 아이처럼 된 노인들의 관심 속에 벤자민은 거꾸로 성장한다. 성장과 함께 젊음의 꼭지점을 돌아 육체의 내리막길을 걷는 우리와 달리 그는 시간이 갈수록 젊어지는 것. 날마다 생명의 샘을 마시는 벤자민은 아직 노인의 모습일 때 한 소녀를 만난다. 그리고 그 소녀,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와의 만남은 둘 모두에게 평생의 인연이 된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어린 시절의 첫만남을 시작으로 몇 번이나 마주치며 사랑을 확인하는 벤자민과 데이지의 이야기다. 이들의 사랑은 평범한 인간들이 그들의 삶에서 겪는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설레는 첫만남을 갖고 서로를 잊지 못하는 그리움을 확인하다 결국 결실을 맺는 듯하지만 끝내 끝까지 함께 하진 못하는 어떤 인연. 다만 이들이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벤자민의 거꾸로 가는 육체의 시계. 만일 평범했다면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을 이들 두 사람은 서로 반대편을 향해 마주쳐 지나가는 성장과 쇠퇴의 시간 때문에 행복해질 수 없다.

 


영화의 한 장면, 벤자민은 연습실에서 무용 동작을 해 보이는 데이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의 눈빛은 상대방에 대한 애정으로 충만하다. 데이지는 그의 눈앞에서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 아마도 둘에게 가장 행복했을 때인 이 시기는 젊어지는 벤자민과 늙어가는 데이지의 서로 다른 시간의 흐름이 용케 만나는 지점이었다. 인생의 이 짧은 한 순간이 지나면 두 사람은 서로 함께 할 수 없는 상실감을 감수해야 한다.
 


두 사람의 평생에 걸친 사랑을 그린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원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상실을 그린다. 어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며 연인과 가족을 막론하고 아끼는 사람을 잃었던 경험을 끄집어 낼 수도, 혹은 인생에서 거쳐가야 하지만 아직 경험하지 못한 그 징검다리를 미리 상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의 의지로부터 벗어난 엇갈린 인연의 안타까움. 해가 갈수록 젊어지는 것은 벤자민의 육체뿐, 그의 내면은 우리와 똑같이 나이를 먹고 고통 받으며 스러져간다. 시간을 거스르는 그의 외양은 오히려 이별의 사유가 된다.

행복했던 순간을 뒤로하고 벤자민이 떠난 뒤, 딸에게 보내는 엽서를 통해 들을 수 있는 그의 메시지는 담담한 어조를 띠고 있다. 나이든 자의 지혜와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동시에 드러내는 그의 대사들은 벤자민의 젊어지는 외모 때문에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이런 벤자민의 모습은 때로 현실에서 젊음을 놓아주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외면의 젊음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잡아두려 하거나 끝내 그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현실의 수많은 사람들. 벤자민은 그들에게 그 모든 것이 허상에 불과한 것이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기억에 데이빗 핀처는 이야기를 장악하기 보다는 영화적 공간을 빈틈없이 재단해내는 감독에 가까운 것 같았고 이번 영화에서 역시 그의 그런 면을 유감없이 발휘해낸다. 특히 데이지가 겪는 교통사고를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성질과 맞물려 묘사하는 부분에선 주어진 장면과 장면을 능수능란하게 배열하면서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그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한 문장으로 간단히 설명될 수 있는 대상을 스크린이라는 공간에 흥미롭고도 넓게 펼쳐놓는 데이빗 핀처의 이런 면을 보고 그를 세련된 기교(技巧)의 소유자라 부르는 것이리라.

그러나 데이빗 핀처는 흥미로운 상상력을 손아귀에 쥔 채 자유자재로 풀어내면서도 오히려 삶의 보편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까지 극단적인 설정이나 숨막히는 공간을 주로 거쳐왔던 그의 카메라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선 한 남자의 일생을 차분하게 바라본다. 단지 몸만이 우리와 다를 뿐 다른 모든 것이 같은 그 사내. 한 작가가 보편적 삶에 근접한 이야기를 할수록 작가로서의 그의 능력은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데이빗 핀처가 우리시대의 놀라운 영화작가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로 봐도 좋을 것이다. 벤자민의 삶은 작은 화살표, 그것은 모든 것엔 만남과 이별이 있고 우리 스스로 그것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인생의 진리를 조용히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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