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번째 전사 / The 13th Warrior (1999)

영화를 보고 있자니 이 이야기를 어디선가 보았던 것 같은 묘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영화는 마이클 크라이튼이 1976년에 쓴 소설 <시체 먹는 사람들(Eaters Of The Dead)>을 원작으로 삼고 있는 작품. 내가 영화에서 느꼈던 기시감은 알고보니 그 소설이 원인이었다. <시체 먹는 사람들>은 다름아닌 고대서사시 ‘베오울프(Beowulf)’ 이야기로부터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작품이고, 내가 최근(?)에 봤던 로버트 저메키스의 <베오울프> 또한 이 이야기를 토대로 완성된 영화다. 작자미상의 이 영웅 이야기를 각색한(<시체 먹는 사람들>의 경우 몇 가지 설정을 빌려온>) <13번째 전사>와 <베오울프> 사이에서 비슷한 점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과정이 아니다.

일단 이야기의 모티브가 매우 닮아있다. <13번째 전사>에서 아메드(안토니오 반데라스)가 만나는 바이킹 전사들은 어느 날 찾아온 소년 전령에 의해 로쓰가르 왕이 통치하는 지역이 괴물들로부터 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이어지는 것은 이 미지의 존재로부터 마을을 지켜달라는 다급한 구호의 메시지. 이에 불리위프(블라디미르 쿨리치)를 위시한 13명의 전사들이 선택되어 여정을 떠난다. <13번째 전사>와 비슷하게 <베오울프>도 로쓰가르 왕이 펼친 술자리에 괴물 그렌델이 습격해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로 그렌델로부터 왕국을 지켜내기 위해 베오울프라는 전사가 찾아온다.

 


도움을 청한 국왕의 이름이 같은 것(Hrothgar, Hroðgar)은 물론 괴물 퇴치를 주도하는 두 주요인물인 불리위프(Buliwyf)와 베오울프(Beowulf)의 이름에서도 서로 비슷한 부분을 찾아낼 수 있다. <13번째 전사>에서 마을을 공격해오는 괴물이자 미지의 야만인 종족을 가리키는 웬돌(Wendol) 또한 <베오울프>의 그렌델(Grendel)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명칭이다.


존 맥티어난은 <13번째 전사>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가와 가족을 지켜내는 용맹한 마초들의 이야기로 만들어냈다. 영화의 주인공은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연기한 아메드이나, 한편으론 과묵해 보이는 인상의 지도자 불리위프가 서사의 중심에 서있다. 영화는 아메드가 가르쳐준 아랍문자를 그대로 기억해내는 그를 우직하지만 무식하지 않은 인물로, 또 쓸데없는 힘 겨루기 없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만 그 능력을 발휘하는, 객기보다는 용기를 가진 현명한 전사로 그려내고 있다. 생소한 얼굴의 체코출신 배우 블라디미르 쿨리치의 듬직한 인상이 역할에 설득력을 더한다.

<13번째 전사>에선 불리위프를 위시한 전사들을 믿음직한 사내들로 묘사하는 어투에서부터 그것을 포장하는 제리 골드스미스의 장중한 음악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철저히 마초적 남성상을 숭상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그 때문에 이 영화가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거나 불편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처음엔 괴물로 오해되었다가 나중에 인간으로 밝혀지는 웬돌들이 금발의 북구 백인남성과 대조되는 유색인종처럼 보이는 것도 충분히 지적될 수 있는 부분이다. 식인 풍습을 지키는 그들은 마치 인간이 아닌 동물과도 같이 묘사되는데, 이는 의리와 명예, 그리고 같은 종족을 지키기 위한 보호본능으로 가득한 주인공 무리들과 비교되는 지점이다.

자, 그럼 이런 점들을 무시할 수 있는 관객이라면? <13번째 전사>는 비록 허구이긴 해도 서로 다른 문화와 문화의 충돌(아랍과 북구)을 재치 있는 대사들로 잘 살려놓고 있으며, 중간중간 아드레날린 분비를 촉구하는 대규모 전투씬을 통해 중세유럽의 야만성과 남성성을 흥미롭게 드러내놓고 있다. 특히 바그다드의 시인이었던 주인공 아메드가 그 지적이고 여성적인 풍모에서 서서히 전사가 되어가는 과정이 영화에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다. <13번째 전사>는 비슷한 분위기의 유럽의 모습을 담은 영화들에 열광하거나 평소 테스토스테론이 다량 분비되는 마초물에 흥미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후회하지는 않을 영화다.


* 영화의 크레딧에는 올라있지 않지만 <13번째 전사>엔 원작자인 마이클 크라이튼이 다시 감독, 재촬영한 부분들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정보사이트들에선 이 작품을 존 맥티어난과 마이클 크라이튼의 공동 감독작으로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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