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코레아니쿠스 (진중권)

 

진중권의 글은 대단히 명료하다. 그는 애매한 표현법, 불필요한 미사여구 등을 사용해, 독자의 판단력을 순간적으로 흐려놓아 (사실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독자자신의 무지를 탓하게 하거나, 내용이 아닌 다른 요소들로 저자에 대한 환상을 심어놓지 않는다. 진중권의 책은 그것을 읽는 이에게 글쓴이가 전하고 싶은 내용만 오롯이 전달해준다. 다만 그의 글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 덧붙여지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유머다. 군더더기 없는 명확한 표현과 촌철살인의 유머로 똘똘 뭉쳐진 진중권의 글쓰기는 정말이지 유혹적이다. 그것은 쉽게 읽히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다.

 


그의 책들은 주제와 소재 면에서 대개 두 갈래로 나뉜다. 한 쪽은 그의 전공을 살려 쓴 미학 관련 책들, 다른 한 쪽은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을 (대개는 비판적으로)조망하는 사회과학 관련 저서들이다. 사실 나는 그의 원래 자리라 할 수 있는, 예술이나 미학을 다룬 그의 저서들을 더 좋아한다. 미학의 전반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미학 오디세이』는 물론이고, 죽음의 이미지를 예술 안에서 찾아내어 그 시대가 가지고 있던 죽음에 대한 인식을 알려주는 『춤추는 죽음』, 21세기의 화두인 상상력을 놀이와 결합해 재미있게 서술한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등을 읽지 않고 진중권의 사회비판적인 일면만 보는 것은 분명 독자의 손실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유머감각은 오히려 그가 우리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때 더 빛을 발한다. 조갑제가 박정희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펴낸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패러디한 제목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보라. 한국우익들의 영웅만들기의 허상을 날카롭게 지적한 책이지만 책을 읽는 내내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보수우익들의 숭고한(?) 이상(理想)을 웃음을 통해 한순간에 유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유머감각은 진중권을 이해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얼마 전 화제가 된 영화 ‘디 워’를 둘러싼 그와 일부 네티즌간의 충돌(?)만 봐도, 유머로 무장한 그에게 ‘진지한’ 욕설로 맞서는 것은 결과적으로 더욱 우스꽝스러워질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과연 그를 이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어쨌든 그를 뛰어넘으려면 일단 웃기는 기술부터 익혀야 한다.

『호모 코레아니쿠스』는 그가 다시 우리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독일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그가 느낀 한국의 낯설음이 이 책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이 책은 시대와 지역의 습속에 따라 변화하는, 혹은 스스로 변화시키는 인간의 몸, 그중에서도 한국인의 몸을 다루고 있다. 『호모 코레아니쿠스』의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전근대와 탈근대다. 진중권은 우리사회가 급격한 근대화를 시도하려 했기 때문에 진정한 근대화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전근대에서 순식간에 탈근대로 뛰어넘었다고 주장한다. 비정상적인 시대의 압축은 한국인의 몸에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전근대적인 사고로 탈근대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IT산업의 발달로 초고속 통신망이 도시를 꿰뚫는 요즘에도 일제시대의 잔재나 6,70년대를 지배했던 군사문화가 우리의 몸속에 각인되어 있다.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는데도 그저 익숙하기 때문에 집요하게 존속하는 폭력들’을 없애기 위해서 그는 우리를 한번쯤 낯설게 볼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그것은 누구를 계몽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저자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며, 단지 그를 포함한 한국인의 습속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철저한 자기인식을 하고자 함이다. 냉정한 자기인식은 더 큰 도약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단계다. 우리는 어쩌면 이러한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그저 기약 없는 발전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일종의 메모의 연속이다. 매 장마다 시작을 알리는 제목 아래로, 그에 관련된 여러가지 사회적 이슈들을 진중권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를테면 철저히 합리적인 판단이 필요한 분야에조차 정념적, 감정적인 시각을 드리우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황우석 사건’으로 경험할 수 있으며, ‘인문학의 위기’라는 주제를 통해, 디지털 사회에 걸맞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기도 한다.

특히 후자에 관련해서 그의 의견은 꽤 흥미롭다. 인터넷의 보급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제약 없이 글을 쓰는 시대가 왔지만, 정작 지금의 글들은 대부분 ‘오랜 사색으로 정제해낸 생각을 주옥같은 언어에 담는’ 것에 실패하고, 오직 ‘반응이 오가는 상황에서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곧바로 글자로 옮겨 적는 대화적 글쓰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자체만으로는 별다른 문제가 될 수는 없겠으나 더 큰 문제는, 문어체와 구어체가 구분되어야 할 지점에까지 그 구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전에 없이 많은 글들이 생산되는 지금, 점점 더 짧은 문장도 모자라 이모티콘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세태를 진중권은 ‘디지털 실어증’의 시대라 부른다.

이 ‘디지털 실어증’이 ‘인문학의 위기’로 이어진다. 이 위기는 ‘문자문화에서 영상문화’로 변화하는 데에 따른 ‘필연적 현상’이다. 그러나 진중권에 따르면 ‘영상으로 문자를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의식이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기에 영상문화의 바탕에 깔린 문자 코드를 해석하지 않고서는 새 패러다임에 효과적으로 적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위기의 기저에는 ‘대학의 시장화’도 있지만, 철저히 문자문화적인 대학의 교육도 일조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21세기의 글쓰기는 ‘예술적’ 글쓰기가 아니라 ‘기술적’ 글쓰기다. 새 시대에 맞는 교육은 널려진 정보를 무작정 짜깁기하지 말라고 당부할 것이 아니라, ‘몽타주를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그 안에서 새로움을 찾아내는 것이 오늘날 교육이 찾을 수 있는 대안이다. 진중권은 그렇게 말한다.

IT 붐(?)에 대한 그의 생각들도 의미 있다. 진중권은 정보 통신 분야가 발달할수록 문자문화로 이뤄진 토대가 더욱 중요하다고 얘기한다. 한국의 경우 근대를 압축한 채, 전근대에서 탈근대로 점프한 것과 마찬가지로, 문자문화를 거치지 않고 구술문화에서 바로 영상문화의 시대로 옮겨온 셈이다. 이런 시대에는 프로그래밍을 하는 사람과 프로그래밍 당하는 사람만이 남는다. 프로그래머가 창조한 세계는 철저히 문자와 숫자로 이뤄진 세계다. 그들은 어떠한 프로그램을 접하더라도 영상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와 숫자로 해체하여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문자문화에 취약한 사람들은 프로그램을 그저 영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것은 그 근본(문자와 숫자)에 다다르지 못한 채, 그저 주어진 ‘매트릭스’ 속에 사는 주민들과 다를 바가 없다. 프로그래머는 21세기의 ‘아키텍트’가 되고 프로그래밍 당하는 사람은 그들이 만든 ‘매트릭스’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독자는 이외에도 다양한 주제와 의견을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접할 수 있다. 하나하나의 주제는 각기 다른 듯 보이나 그것들이 모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 즉 지극히 한국적인 몸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제는 필요 없는 구시대의 유물을 아직까지 간직한 ‘폭력적인’ 몸이고, 합리와 비합리를 구분 짓지 못하는 ‘전근대적인’ 몸이며, 한편으론 세계제일의 IT국가를 꿈꾸면서도 기꺼이 ‘매트릭스의 주민’이 되기를 자처하는 ‘모순적인’ 몸이다. 우리가 이러한 몸에 갇혀 있을 때, 우리의 생각은 결코 창의적으로 변화될 수 없다. 21세기의 화두는 ‘창의력’, 이 시대를 살면서 창의적이지 못한 의식은 자연스레 도태될 지도 모른다.

진중권의 지적은 우리 자신의 현주소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날카롭다. 그의 지난 저서들에 비해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다소 유머가 희석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유머란 누군가를 풍자하거나 비웃을 때 더 큰 효과가 나는 법인데, 그가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엔 오히려 애정이 담겨있다. (화려한 미사여구가 없다는 의미에서)건조하고 냉정한 글 속에서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은 과연 나뿐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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