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인(夢印)', 우라사와 나오키 - 스토리보다 캐릭터
- 책 이야기/독서 노트
- 2024. 11. 12.
나는 왜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들을 좋아하게 되었나
'드래곤볼'과 '슬램덩크'에 열광하던 내게 ‘마스터 키튼’과 ‘몬스터’는 앞의 두 작품과는 결이 다른 또 하나의 놀라운 세계였다. 음모와 범죄, 풍부한 역사적 배경, 영화 같은 연출, 매력적이고 깊이 있는 캐릭터로 가득찬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들을 좋아하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마스터 키튼’과 ‘몬스터’에 이어 ‘20세기 소년’과 ‘PLUTO(플루토)’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을 읽고 실패한 적은 없다. (아쉽게도 ‘빌리 배트’는 아직까지 읽지 못했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만화에 대해 가지는 일부 편견 섞인 통념과는 조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가 그리는 세계에서는 한 챕터가 시작되며 아무 설명 없이 처음 보는 캐릭터가 등장하거나 모종의 사건이 갑작스럽게 발생되는 경우가 잦다. 독자는 인물과 상황에 궁금증을 갖게 되고, 이어지는 내러티브에서 인물의 빈 공간과 사건의 배경이 채워진다. 이 과정에서 읽는 이는 긴장감, 스릴, 감동 같은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만화적 상상력으로 포장되는 비약보다는 그럴듯한 핍진성으로 사건의 토대를 채운다. 앞뒤 사건이 논리적 인과 관계를 가진다.
각 캐릭터가 가진 나름의 사연이 그들이 하는 행위에 일말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선역과 악역 관계없이 독자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을 통해 인물에 대한 독자의 관점이 수시로 바뀌게 해, 뒤에 벌어질 일을 예상하기 어렵게도 만든다.
내가 제대로 읽지 못한 ‘YAWARA!(야와라)’ 같은 작품은 조금 다르다고 하는데, 적어도 앞에서 언급한 ‘마스터 키튼’, ‘몬스터’, ‘20세기 소년’, ‘PLUTO’에는 모두 위와 같은 특징이 보인다. 궁금증, 긴장감, 스릴, 감동, 연민, 반전의 종합선물세트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짧은(?) 장편 '몽인(夢印)'
‘몽인(夢印)’은 ‘마스터 키튼’, ‘몬스터’, ‘PLUTO’를 종이책으로 사 모으다가 우연히 발견한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이다. 나는 한 권으로 되어있는 일반판을 구입했는데, 두 권짜리 박스 세트로도 판매되고 있다. 수 권으로 되어있는 그의 여타 작품들에 비해 길이가 매우 짧은(?) 장편이다.
夢印. ‘꿈의 흔적’ 혹은 ‘꿈의 자국’ 정도로 번역되면 좋을 듯한 제목이다. 영문판 제목은 원제의 원어 발음과 해석을 병기한 ‘Mujirushi: The Sign of Dreams’이다.
카모다는 작은 제조 공장을 운영하는 가장이다. 아이답지 않게 냉철하고 현명해 보이는 그의 어린 딸 카스미와 달리, 아버지 카모다는 성급하고 요령 없는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의 섣부른 판단으로 경제적 위기 상황에 놓인다. 어려워진 처지에 카모다는 인생을 거의 포기하기 직전이다.
그때 그는 영물 같은 어느 까마귀를 보게 된다. 카모다는 무언가에 홀린듯 까마귀를 쫓아 간다. 까마귀는 그들을 수수께끼의 사내가 사는 장소로 이끈다.
단발머리와 뻐드렁니, 고고하고 우아한 척하는 말투, 다소 익살맞은 행동이 특징인 사내. 카모다 부녀는 프랑스와 연관있는 어느 연구소의 ‘소장’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한 남자를 만난다.
자신을 장황하게 소개하던 ‘소장’은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인 카모다에게 솔깃한 제안을 한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요하네스 페이메이르의 그림 ‘레이스 뜨는 여인’ 원본을 잠시 숨겨달라는 제안이다. 1
그는 원본이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사라져있는 동안 그가 직접 그린(그의 행실로 보아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작을 원작으로 속여 고가에 판매할 계획이다. 계획이 성공하면 카모다는 그 이익금의 일부를 받게 된다.
‘소장’은 부탁 하나를 덧붙인다. 그의 뻐드렁니와 기묘하게 비슷해보이는 마크가 새겨진 작은 돌을 루브르 박물관 내 어느 조각상 앞에 되돌려 놓아달라는 부탁이다.
카모다는 ‘소장’의 제안에 동의하며 이를 그간 쌓인 빚을 청산할 기회로 삼는다. 현실 감각이 아버지보다 나아보이는 어린 딸 카스미는 이런 아버지가 우려스럽다.
이제 이야기는 일본에서 프랑스 파리로 이어지고, 미술품 도난(숨김) 이야기인 줄 알았던 부녀의 모험이 정치적 스캔들과 묘하게 엮이기 시작한다.
‘몽인’의 스토리가 작가의 다른 작품 ‘마스터 키튼’ 속 한 에피소드였어도 전혀 이질감이 없었을 것이다. 일본과 유럽의 연결, 예술품을 둘러싼 범죄, 정치적 스캔들 등 ‘마스터 키튼’ 스토리를 구성하는 키워드들이 ‘몽인’에도 고스란히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로서의 만족감이 꽤 다르다. ‘몽인’은 흥미로운 설정을 가지고 있음에도 ‘마스터 키튼’의 어느 에피소드보다도 긴장감과 밀도가 떨어진다. 왜 그럴까?
‘몽인’에는 앞서 말한 우라사와 나오키 작품들의 특징이 전반적으로 다운그레이드되어 스며들어 있다.
미국 대선 후보가 연루되어있는 스캔들이 드러나고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에서 비약과 억지가 느껴진다. 주요 인물들의 배경 스토리가 모호하고 얄팍하다는 것도 단점이다. 거기다 작품의 전반적인 톤은, 코믹 요소로 인해 진지함과 거리가 멀다. ‘마스터 키튼’, ‘몬스터’, ‘20세기 소년’에도 유머가 곁들여져 있지만, 스토리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무겁고 진지한 사건들이었다.
이 작품이 제작된 배경을 알게 되면 이 같은 단점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몽인’은 작가가 루브르 박물관과의 협력을 통해 이벤트성으로 창작한 작품이다. 따라서 긴 호흡으로 촘촘하게 설계된 스토리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몽인’에서 독자의 눈을 붙잡는 것은 스토리보다는 어느 한 캐릭터이다.
데즈카 오사무에 이어 이번엔 아카츠카 후지오
스토리 자체의 매력이 크지 않은 ‘몽인’에서 내가 인상적으로 느낀 것은 ‘소장’으로 불리는 ‘이야미’라는 캐릭터이다. 뻐드렁니의 그 사내 말이다.
‘이야미’는 아카츠카 후지오의 만화 ‘오소마츠 군’(1962-1969)에 등장하는 동명의 캐릭터를 토대로 만들어진 인물이다. 원작의 이야미는 주인공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엄청난 인기를 얻었던 캐릭터라고 한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이미 데즈카 오사무의 걸작 ‘우주소년 아톰(철완 아톰, 鉄腕アトム)’ 중 “지상 최대의 로봇” 에피소드를 ‘PLUTO’라는 명작으로 리메이크한 바 있다.
‘PLUTO’가 데즈카 오사무에게 바친 헌사인 것처럼, ‘몽인’ 역시 이야미라는 캐릭터를 통해 선배 만화가인 아카츠카 후지오에게 보내는 오마주인 것이다.
이 캐릭터가 원작에서 어떻게 묘사되었는지 보지 못했기 때문에 ‘몽인’을 읽으며 작가가 의도했을 즐거움과 감동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우라사와 나오키가 존경을 담아 윗세대 작가의 캐릭터를 가져와 거기에 자신만의 결을 입히는 과정이 의외로 흥미롭다.
‘몽인’을 읽고 궁금증이 생겼다. 우라사와 나오키가 이 인물을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킨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몽인’에서 묘사된 이 캐릭터의 성격은 원작의 그것과 어떻게 비슷하고 어떻게 다를까?
작가의 이름값을 생각할 때 스토리 자체는 기대만큼 매력적이지 않았던 ‘몽인’. 다만, 연이어 선배 작가들의 아이콘 격인 캐릭터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가의 행보가 눈길을 끈다.
- 작품 속에서는 ‘레이스를 뜨는 여인’으로 불린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