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적 근거가 아닌 직관에 의존한, 비효율적인 학습 전략
- 그렇다면 어떤 학습 방법이 효과적일까? ‘인출’, ‘정교화’, ‘분산 학습’, ‘교차 학습’에 대해
- 어렸을 때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책,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과학적 근거가 아닌 직관에 의존한, 비효율적인 학습 전략
몇 년 전 1대1 영어 회화 튜터링을 받을 때였다. 첫 만남에 레벨을 측정하기 위한 간단한 대화를 나눈 후 원어민 선생님은 이런 질문을 했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학습 방식을 선호하세요? 시각 자료로부터 더 효과적으로 배우는 타입인가요, 아니면 청각 자료가 학습 내용을 이해하기에 더 효과적이던가요?”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이 질문은 뉴질랜드의 교육 연구자 닐 플레밍(Neil Fleming)이 고안한 ‘VARK 학습 양식’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개인의 특성에 따라 더 효과적인 학습 방법이 있다는 주장이자 개념이다.
이 개념에 따르면 학습자의 특성을 네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다. ‘V - 시각적 학습자(Visual learner)’, ‘A - 청각적 학습자(Auditory learner)’, ‘R - 읽기/쓰기 학습자(Reading/Writing learner)’, ‘K - 운동감각적 학습자(Kinesthetic learner)’가 그것이다.
어딘가 그럴듯하게 들리는 개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귀로 들음으로써 정보를 더 잘 습득한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배운 내용을 읽고 쓰면서 더 잘 기억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이 개념은 말 그대로 ‘그럴듯할 뿐’인 개념이다.
실증 연구에 기반한 효과적인 학습법에 관한 책,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영어 원제: Make It Stick)에 따르면 닐 플레밍의 ‘VARK 학습 양식’은 과학적 근거가 거의 없는 이론이다.

당시 내 원어민 영어 선생님의 관심과 노력을 폄훼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때는 나도 그런 게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 선생님도 자신이 배운 내용을 토대로 학생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라고 믿는다.
문제는 이 ‘VARK 학습 양식’이 지금도 효과가 있는 분류법으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글링을 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에는 이외에도, 과학적 연구 결과가 아닌 직관과 경험에 의존한 비효율적인 학습 방식이 여럿 언급된다. 모두 우리가 오랫동안 효과적이라고 잘못 알고 있던 방법이다.
- 한 가지 과목만 집요하게 공부하는 방식,
- 한 주제, 기술, 유형을 모두 마스터한 다음에야 다음 주제, 기술, 유형으로 넘어가는 학습 방식(예를 들어 수학의 ‘집합’ 단원을 충분히 오랫동안 공부한 후 ‘함수’ 단원으로 넘어가는 것 같은),
- 시간 간격을 두지 않고 과도하게 반복하는 학습 방식,
등은 모두 실증적 근거가 부족한, 우리의 직관에 의존한 학습 방법이다.
현재에는 없어졌을 거라고 믿고 있는데, 내가 학생이던 수십 년 전에 ‘깜지’라는 것이 있었다. 흰 종이에 배운 내용을 빽빽하게 적는 행위였다. 교실에서 저지른 어떤 잘못에 대한 벌칙으로도 쓰였지만, 실제 그런 방식으로 학습 내용을 머리에 집어넣고자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지금 와서 보면 그것은 아무런 학습 효과가 없는 ‘단순 노동’이었다. 배운 내용을 외우고 있다고 믿으며 한 행위였으나, 이런 식으로 집중적이고 반복적으로 공부한 내용은 장기 기억에 저장되지 않는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판명되었다.
그렇다면 어떤 학습 방법이 효과적일까? ‘인출’, ‘정교화’, ‘분산 학습’, ‘교차 학습’에 대해
자, 이제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에서 실증적 연구로 효과가 입증된 학습 전략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이 책에서 가장 먼저 제시되는 학습 전략인 ‘인출’ 개념을 활용해 책을 보지 않고 내용을 정리해본다. (물론 아래 내용을 쓴 후, ‘팩트 체크’를 위해 책 내용과 비교하는 사후 점검을 마쳤다.)
- 배운 내용을 스스로 떠올리는 ‘인출(Retrieval)’
- 공부한 내용을 스스로의 언어로 재구성하여 기존 지식과 연결하는 ‘정교화(Elaboration)’
- 시간 간격을 둔 반복 학습(‘분산 학습’)
- 한 분야, 한 단원만 집중적으로 학습 또는 연습하지 않고 다양한 유형의 문제를 섞어서 공부하기(‘교차 학습’)
우선 ‘인출’에 대해.
이 책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는 ‘인출’의 대표적인 방식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험이나 퀴즈이다.
시험은 오랫동안 교육 현장 안팎에서 학습자의 창의성을 저해한다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에 등장하는 시험은 학업 성취도를 측정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학습 효과를 높이는 도구로서의 시험이다. 즉, ‘인출’을 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인 것이다.
공부할 내용을 단순히 반복적으로 읽는 것은, 처음 한 번만 읽고 그 다음에 시간 간격을 두고 반복하여 ‘인출’ 노력을 하는 것보다 학습 효과가 떨어진다.
'정교화'란 무엇인가.
‘정교화(Elaboration)’는 ‘인출’과 동떨어진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정교화’에는 ‘인출’이 필요하다. ‘정교화’는 배운 내용을 끄집어내되(‘인출’) 본인만의 언어로 다시 구성하는 과정이다.
A라는 개념을 공부했다고 가정해 보자. A를 쉬운 어휘를 사용하여 노트에 정리해 보는 행위나, 타인에게 이해가 잘 되도록 설명하는 행위는 모두 ‘정교화’의 일종이다. 이 과정은 새롭게 학습한 내용과 이미 알고 있는 사전 지식을 연결하여, 학습자가 A를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그 내용이 장기 기억에 저장되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분산 학습’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시간 간격을 둔 반복 학습은, 오늘날 수많은 외국어 학습자들이 활용하는 플래시카드가 대표적 예이다.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외국어의 어떤 단어나 표현을 새로 습득한다고 예를 들어 보자. 이 어휘를 종이에 반복하여 쓰거나 눈이 뚫어져라 긴 시간 쳐다보고 있는 것은 효과적인 학습 방법이 아니다. 반대로 한 번 공부를 하고 나서 하루 혹은 이틀 후 다시 공부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그 후에도 학습 행위 사이에 시간 간격을 두는 것이 좋다.
여기에 무엇을 더하면 더 효과적일까? ‘인출’ 행위를 더하면 된다. 간격을 둔 반복 학습을 할 때, 공부했던 어휘를 그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처음 학습 시 만들어 둔, 어휘에 대한 질문을 보고 답을 떠올리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Anki 같은 플래시카드 앱을 활용하면 이를 시스템화할 수 있다.
‘교차 학습’으로 가 보자.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를 읽을 때 유난히 흥미로웠던 대목이 있다. 3장 ‘뒤섞어서 연습하라’에 소개된 한 연구이다. 연구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8세 아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다. 아이들은 12주 후 바구니로부터 90cm 떨어진 곳에서 콩 주머니를 던져 넣는 시험을 보기로 예정되어 있다. 두 그룹 중 하나는 앞서 말한 시험 방식과 똑같이, 바구니에서 90cm 거리에 있는 곳에서만 콩 주머니를 던지는 연습을 한다. 이 그룹을 A라고 하자. 나머지 한 그룹은 90cm 거리에서는 연습을 하지 않고, 60cm와 120cm 거리에서만 번갈아 던지기 연습을 한다. 이 그룹은 B로 칭하자.
12주 후 시험 결과는 놀라웠다.
우리의 직관으로는 A 그룹 아이들의 성적이 나을 것으로 예상하기 쉽다. 시험 방식과 같은 조건에서 연습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B 그룹 아이들의 성적이 훨씬 좋았다. 한 번도 90cm 거리에서 던지기 연습을 해 본 적 없는 아이들이 정작 90cm 떨어진 곳에서 하는 시험에서 더 잘 던진 것이다.
하나의 학습 대상을 모두 배웠다는 느낌, 익혔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연습하는 것은 그렇게 되었다는 착각을 일으킬 뿐 실제로 제대로 학습이 이루어진 것과는 거리가 있다.
90cm 거리에서 던지기 연습을 한 아이들처럼 하나의 내용에만 몰두하는 것을 책에서는 ‘집중 연습’이라고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60cm와 120cm 거리에서 던지기 연습을 한 아이들처럼 서로 다른 조건에서 연습하는 것을 ‘변화를 준 연습’, 이 두 거리에서의 던지기를 순서를 뒤바꿔가며 연습했다면 이는 '교차 연습'이라고 할 수 있다.
‘집중 연습’을 하다 보면 그 연습은 점점 쉬워지고 우리의 뇌는 그것을 제대로 학습했다고 착각하기 쉽다. ‘집중 연습’보다 ‘교차 연습’과 ‘변화를 준 연습’은 더 큰 노력을 필요로 한다. 후자의 연습 과정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습자는 이를 통해 상황을 제대로 판별할 수 있는 능력, 향후 학습 내용을 더 널리 적용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게 된다. 이는 곧 맥락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도출하는 능력이 향상된다는 말이다.
어렸을 때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책,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말을 흔히 한다. 직장인이 되면 업무 관련 지식과 노하우를 익히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직장 밖 자기 계발을 위해서도 무언가를 배우는 행위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학습이 중점적으로 이루어지는 시기는 학생 신분일 때이다.
‘VARK 학습 양식’이나 ‘깜지’ 같은 그 실증적 근거가 희박한 학습 개념 혹은 방법이 아니라, 직관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도 결국 실제적 효과가 있는 ‘인출’, ‘정교화’ 같은 개념을 그 시기에 알게 되었다면 어땠을까?
그것들을 학습에 적용하면서 그렇지 않았으면 있었을 시행착오를 방지하고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과학적으로 효과적이라고 입증된 방법들이 공교육 시스템 안에 녹아있었다면 전반적인 교육의 질이 폭발적으로 올라갔으리라는 아찔한 상상도 해 본다. 이 책을 읽으며 무언가 뒤통수를 때리는 듯한 느낌이 든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는 2014년 미국에서 발간되었고 한국에도 같은 해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즉, 이 책에 소개된 개별 연구 중 일부가 수십 년 전 내 학창 시절에도 존재했을지 모르나, 이 책이 이뤄낸 것처럼 각 연구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그로부터 도출된 학습 방법을 그 옛날에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앞에서 해 본 상상은 상상일 뿐이라는 얘기이다.
책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내용, 그리고 내가 흥미롭게 본 내용을 앞서 정리해 두었다. 하지만 책에는 이밖에도 학습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훌륭한 연구 결과들이 그 근거와 함께 풍부하게 기술되어있다.
무언가 배우고 연습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감히 필수 서적이라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