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리뷰] Days Of The New: Days Of The New, Orange (1997)

 



‘창의적’이라는 말이, 이제는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기존에 이미 있는 재료들을 얼마나 솜씨 좋게 버무리느냐를 뜻하는 시대가 되었다. 한 옥타브의 음을 반음까지 다 합쳐봐야 12개에 불과하고, 그것을 나름의 규칙으로 만들어낸 갖가지 스케일과 모드는 이미 충분하고도 넘치게 사용되었다. 대중음악에서 인기를 '끌 수밖에 없는‘ 코드진행과 멜로디구성이 공식처럼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대중음악 생산자들만 아는 비밀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밀이 아닌 채로 공공연히 사용되면서도, 수동적인 소비자는 끝없이 생산된다. 대중음악에서 미지의 영역이 거의 없어진 지금, 사람들은 익숙한 것에 그저 만족하고 있다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찾는 수고를 이미 멈추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우의 수가 모두 소비된 지금에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는 선구자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한 두 세대쯤 전의 것을 마치 새로운 것인냥 쏟아내는 부류들도 이 범주에 포함될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진정 ‘창의적인 조합’을 이뤄내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헐리웃을 덜 떨어지게 복제한 영화에 ‘한국의 전설’ 하나 얹었다고 동서양 문화의 성공적인 크로스오버라 부르지 않듯이, 울부짖는 일렉트릭 기타에 꽹과리 하나 얹는다고 창의적인 조합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맛도 없는 섞어찌개가 큰 문화적 감흥을 던져주기는 불가능하다. 전혀 새롭지 않은 그런 걸로 심지어 ‘세계최고’의 자리에 오르리라 믿고 싶은 사람들도 있는 것 같지만, 새로운 것이 주는 충격은 미리 마음먹고 응원한다고 찾아오는 것은 아닌 게 분명하다.

잡설이 길었고, 어쨌든 이들의 음악은 분명 새롭게 들렸다. 켄터키 루이스빌 출신의 4인조 밴드 Days Of The New(이하 DOTN)의 음악은 그 이름만큼이나 새로웠다. 통상 오렌지 앨범이라 불리는 DOTN의 셀프타이틀 데뷔음반(1997)은 단지 개별의 음악형식으로 존재했던 어쿠스틱 사운드와 얼터너티브, 그런지의 조합이 얼마나 창의적으로 들릴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물론 이미 Alice In Chains가 그들의 EP 『Sap』, 『Jar Of Flies』를 통해 비슷한 실험을 한 적은 있지만, DOTN은 그것을 단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팀 음악의 정체성으로 삼았다는 것에서 차이가 있다.


앨범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Days Of The New』에 수록되어 있는 11곡 중, 어느 구석에도 일렉트릭 기타의 흔적은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재밌는 것은 동시에 당시 시류에 편승했던 그 어떤 헤비뮤직 보다 이들의 어쿠스틱 음악이 훨씬 더 묵직한 느낌이다. 이들의 탄생에는 분명 90년대를 휩쓸고 간 선배밴드들의 역할이 컸을 테지만, DOTN은 단순히 유산(遺産)의 재탕에 머물지 않고 그 재료를 새로운 그릇에 담는데 성공했다.

이후의 팀의 방향을 고려할 때 DOTN은, 보컬과 기타를 맡은 Travis Meeks의 일인 프로젝트라 봐도 과언이 아니지만, 어쨌든 기타의 Todd Whitener, 베이스의 Jesse Vest, 드럼에 Matt Taul이라는 이름의 멤버들을 데뷔앨범의 부클릿에 표기해놓고 있다. 살짝 놀라운 것은 『Days Of The New』가 발매되던 때, 멤버전원의 평균연령이 스무살이 채 되지 않았다는 점과, 그중에서도 분명 인생의 쓴 맛을 느껴봤음직한 목소리를 보유한 트래비스 믹스의 나이가 열일곱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DOTN의 음악에서 느껴지는 정서적인 깊이는 단지 우울한 느낌의 리프와 코드를 사용했다고 해서 형성된 것은 아닐 진데, 많은 나이에도 이런 음악을 만들어내는 뮤지션을 보기 힘든 우리나라에서는 곱절이나 부러운 음악적 토양이다. 어린나이에 언론으로부터 천재의 타이틀을 부여받은 우리나라의 뮤지션들은 지금 우리 음악계 어디쯤에 와있는지 새삼 생각나게 만든다. 과연 그런 인물이 성장할만한 음악적 토대가 존재했었는지 조차도 의문스럽지만.


앨범 『Days Of The New』의 사운드는 그런지와 하드락, 블루스와 컨트리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미국적인 락뮤직의 총집합처럼 들린다. MTV 뮤직비디오의 히트와 함께 잘 알려진 노래 “Shelf In The Room"의 중독성 있는 반복 아르페지오와, 또 다른 히트 싱글 ”Touch, Peel And Stand"의 헤비한(!) 기타리프, 전체적인 앨범의 분위기와 동떨어진 듯  경쾌한 진행 속에서도 얼터너티브, 그런지의 영향력을 숨기지 못하는 “The Down Town"의 매력적인 멜로디라인, 이 세가지 요소만으로도 이 앨범의 가치는 충분하다. 거기에 R.E.M.과 Alice In Chains, 그리고 Pearl Jam의 분위기를 모두 간직하고 있는 ”Now", 우울한 아르페지오 진행에 더해진 주술을 읊조리듯 트래비스 믹스의 보컬이 인상적인 마지막 곡 “How Do You Know You?" 등은 보너스 치고는 과하게 훌륭하다. 

이후 오렌지 앨범 이후 밴드멤버들을 모두 해고해버린 트래비스 믹스는 역시 셀프타이틀의 앨범인 그린과 레드를 발매했다(즉 타이틀은 따로 없이 재킷의 색에 따라 구분한다). 최근에는(사실 그렇게 최근도 아니지만) 네 번째 앨범인 퍼플이 발매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으나 그 실상은 트래비스 믹스만이 알 것이다.

 

 

Days Of The New:
Days Of The New, Orange
(1997)

01. Shelf In The Room
02. Touch, Peel And Stand
03. Face Of The Earth
04. Solitude
05. The Down Town
06. What's Left For Me?
07. Freak
08. Now
09. Whimsical
10. Where I Stand
11. How Do You Know You?

 

* 이미지출처 travismeek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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