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사랑… 아니 좋아하게 되면 그 대상의 표정이나 습관, 심지어 단점까지도 좋아진다. 그 모든 것이 상대방을 이루는 일부이기 때문이리라. 대상이 되는 그녀는 하나의 완전체. 그녀를 향한 호감이 가파르게 상승곡선을 이루는 바로 그때, 우리는 그가 어떤 흠을 가지고 있든 괘념치 않게 된다. 마치 신체기관의 일부처럼 그 단점들이 없다면, 좋아하는 그녀(혹은 그) 역시 존재할 수조차 없으니까. 하나님 부처님, 미천한 저에게 이토록 과분한 여인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잘 믿지 못하는 이유다. 눈에 ‘콩깍지’가 씌워지는 바로 그 시기 때문에 말이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그토록 아름답던 그녀의 표정이 평범한 것으로 절하되더니, 때로는 그것이 급기야 싸움의 빌미가 되기..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샤말란의 영화 속 반전에 대한 강박은 이제 관객의 몫이 되어버렸다. 감독은 이미 영화의 내용을 통째로 뒤흔들 반전 따위, 자신의 호주머니 속에서 꺼내버렸는지 모른다. 은 샤말란이 오랜만에 호되게 뒤통수를 가격해주리라 기대한 관객들에게 기대 이하의 결과물임이 분명하다. 이 영화는 충격적인 반전 같은 것은 품고 있지 않으니까. 다만 언제나 그렇듯 에도 초현실적인 현상에 대한 감독의 관심사가 표면화되어 있고, 별다른 공포장치 없이도 관객을 숨죽이게 만드는 그의 탁월한 연출력이 살아있다. 샤말란의 영화를 반전의 유무(혹은 그 강도)로만 평가하는 것은 결국 충족되지 않은 기대감에 실망만 느낄 관객의 손해로 고스란히 돌아올 뿐이다. 환경재앙에 대한 일종의 경고로도 읽힐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