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 자연의 일부로 사는 것과 자연 위에 군림하는 것



내게 라틴 아메리카의 작가는 아직까지 생소하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문학의 중요한 지점들은 온통 백인 중심의 영미, 유럽계 작가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독서량이 많지 않은 나로서는 남미의 작가들까지 챙겨본다는 것이 그리 수월친 않다. 지금 현재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미국, 유럽중심의 철학과 생활패턴임을 상기해볼 때 그 사실은 더욱 그렇다. 몇몇 유명한 작가들을 제외한다면 에콰도르나 칠레, 아르헨티나 등의 작가들을 언제 찾아보고 떠올려 보겠는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읽게 된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이렇게 문학적인 미지의 세계(철저히 개인의 부족한 경험에 의한 판단이지만)였던 라틴 아메리카, 그 중에서도 칠레 출신의 루이스 세풀베다라는 작가를 나에게 알려준 소설이다.

농부 출신으로 아마존의 수아르 족의 생활터전으로 이민한 주인공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는 우연히 자신이 글을 읽을 줄 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연애 소설에 탐닉하기 시작한다. 주인공들의 만남과 좌절이 다시 사랑으로 결실을 맺는 과정은 그에게 언제나 편안한 즐거움을 준다. 자신의 오두막의 그물그네에 누워 이렇게 소설을 읽는 것을 낙으로 여기던 그에게 불편한 기운이 다가오는 것은 어느 백인의 시체가 발견되면서부터다. 거대한 발톱으로 훼손된 듯한 신체가 밀림의 위험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인간이 자초한 것이다. 자연의 보고인 아마존은 밀렵꾼과 노다지꾼, 그리고 여기에 발전을 빌미로 한 자연의 파괴자들이 모여들면서 점차 혼돈의 공간으로 변해간다. 이것은 야생과 인간의 본격적인 대결로, 그 동안 노인을 비롯한 원주민들이 나름대로 자연과 공존하며 살았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다. 생존을 위한 사냥과 채집이 아닌 탐욕을 채우는 밀렵과 개간인 것이다. 지역의 유일한 행정기관장인 읍장은 경험 많은 노인을 앞세워 사람들을 위협하는 맹수를 잡아 이 위기를 극복하려 하는데…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아마존의 밀림을 배경으로 인간과 야생동물의 대결이 이야기의 주축을 이룬다. 이 책의 ‘옮긴이의 말’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개인적으로도 이 두 생물체의 대결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아마존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인간으로서의 노인을 재발견 하기 위한 자연이 아닌, 말 그대로 이 둘의 맞대결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서구사회가 자연을 철저히 개발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제는 전세계가 이에 동참하고 있지만)을 그대로 투영하는 것이다. 노인은 남은 노후를 연애 소설을 읽으며 편안하게 보내고 싶어하지만 인간의 무분별한 활동은 그를 다시 자연의 맞상대로 데려다 놓는다. 인간은 자연 안의 존재가 아니라 자연 밖에 존재하며 그것은 노인과 암살쾡이의 대결로 상징된다. 이것은 이제는 조용히 자연과 동화되고픈 그의 노년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인간사회라는 집단의 의식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루이스 세풀베다는 자신의 목소리를 소설 속에 뚜렷하게 각인하기 보다는 이렇게 상징적인 방법과 지나가는 부분묘사들로 드러낸다. 이런 그의 비유가 자연에 대항하는 인간으로서의 스스로를 되돌아보라고 독자에게 얘기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엔 자연에 대한 시각뿐만 아니라 읍장으로 상징되는 권력의 무능력과 부조리 또한 담아내고 있다. 세풀베다는 자연을 훼손되어선 안 되는 숭고한 존재로 앉혀놓고 인간의 어리석음을 질타한다. 소설의 마지막은 생물의 죽음을 자연의 순환에서의 자연스런 과정임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는데, 반면에 인간은 살아있을 짧은 동안의 욕망에 의해 권력과 물질을 탐하며 살아가고 있다. 작가의 시각이 현실과 적당히 타협점을 찾는 종류의 것은 아니어서 때론 이상적이고 관념적으로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이 어차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도착한 이상(이미 자연은 인간의 무분별한 행동에 대응하기 시작했으므로), 1989년에 발표된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의 메시지가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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