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만감일기 (박노자)


박노자 선생(그가 호감을 가진 여타 지식인들을 지칭할 때 늘 그러듯)을 처음 안 것은 군대시절이었다. 소위 '짬'이라는 것이 좀 차고 일과 시간 후 여유시간이 드디어 볕을 보기 시작했을 때, 부대 내 독서실(이라고 해 봤자 서너 평 남짓의 공간이었지만)에서 우연히 접한 책이 그의 저작이었다. 책의 제목은 정확히 기억 나지 않는데(어둑한 기억을 더듬어 본 결과 그 책은 아마도 <당신들의 대한민국>이었을 것이다), 솔직히 책의 내용보다 토종 한국인보다 한국어를 훨씬 잘 구사하는 귀화인의 존재가 신기하기도 했고 존경스럽기도 했다. 물론 '한국인'이 아닌 '귀화인'이라는 단어를 그가 듣는다면 탐탁지 않게 여기리란 걸 알지만.

<박노자의 만감일기>(이하 <만감일기>)는 박노자 선생이 인터넷에 올려왔던 에세이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짧은 글마다 그때그때 저자의 주변에 일어났던 일이나 사회안팎에서 벌어졌던 현상들에 대한 소회를 담았다. 책에서 선생은 노르웨이와 한국에서 '타자'로 살아가는 자신, 성장의 촉진제로서 도입된 경쟁이 인간의 등급화를 가속화하고 무기력한 이탈자들에게 냉혹한 한국사회, 주식회사 대한민국과 김씨왕조 왕국 북한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사회적 모순 등을 이야기한다.


생존을 위해 세상의 톱니바퀴에 몸을 끼운 채 바삐 굴러가다 보면, 우리가 상식 혹은 관례라고 부르는 암묵적인 폭력이나 편견들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매사를 정돈된 사회주의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선생의 기록은 반복적 일상의 나태함에 젖어 별 생각 없이 사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군대문화가 뿌리깊게 스며든 한국사회에서 우리는 자연스런 권위와 강제적인 서열을 혼동하거나 어린 시절 학교에서부터 우리 몸에 가해진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 씁쓸한 예지만 이 글의 바로 첫 단락에서 언급했던, 내가 군대시절의 후반 여유시간을 가지게 된 사실도 이런 수직적이고 경직된 서열체계로부터 얻은 혜택일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군대의 하부계급이 그들에게 가해지는 유무형의 폭력, 즉 자유의 제한, 내무실의 허드렛일 등을 감수함으로써 상급자였던 내가 갖게 된 반사이익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그 괴로운 단계를 거쳐 왔다는 사실에 대한 보상심리로 그 황홀한 자유(?)를 아무 거리낌 없이 만끽한 것이다.



이렇게 의심이나 저항 없는 현실에 살던 우리는 박노자 같은 지식인의 글을 읽을 때에야 비로소 사회에 대한 공정한 시선을 얻게 되고, 그를 통해 나와 타인, 사회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며 이 사회의 어딘가 기울어진 모습에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박노자 선생이 작게나마 기대했던 이 책의 순기능일 것이다. 선생이 화두를 던지면 독자들은 같이 고민한다. 선생은 그 개별적인 고민들이 모여 이 '야만'의 시대에 '저항의 에너지'가 되기를 기대한다.

<만감일기>는 얼핏 진중권의 <호모 코레아니쿠스>를 연상시킨다. 두 책은 모두 한국의 외부에서 한국을 바라본다. 두 저자 모두 법적으론 한국이라는 테두리 내에 있으면서도 가능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는 것이나, 책에 담긴 비판적인 어조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한국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것도 비슷하다.

한국인으로서 스스로의 모습을 이들처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승자가 모든 걸 가져가는 대책 없는 경쟁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부의 상위 1% 계층에 편입되기 위해 온갖 편법을 일삼는데 익숙해져 있으며(혹은 그런 타인들을 지지하거나 숭상하며), 우리가 당한 폭력을 반드시 대물림 해야 한다는 잔인한 사고방식을 세상사의 진리라 믿고 사는 우리 삶의 당위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일 것이다. <만감일기>는 우리의 비관적인 믿음과 그런 일상에 브레이크를 건다. 우리는 모든 게 잘 흘러가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언론과 정치인, 부의 리더가 튼튼히 건조한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당신이 우리가 사는 이 매트릭스 어딘가로부터 모순적인 균열이 느껴진다고 고백한다면 박노자 선생은 기꺼이 빨간 약을 건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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