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발매된 화이트스네이크(Whitesnake)의 “1987: 30th Anniversary Edition”
2017년, 화이트스네이크(Whitesnake)의 “1987” 앨범 발매 30주년 기념 음반이 발매되었다. 이때 발매된 앨범의 구성은 버전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크게 2CD, 4CD(+DVD)와 LP(Vinyl) 구성이 있는데, 이중 2CD 음반도 두 번째 CD에 데모와 리믹스 트랙이 담긴 것과 “1987” 앨범 발매 후 이루어진 투어의 라이브 트랙이 있는 것으로 나뉘어진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CD2에 앞서 말한 라이브 트랙이 담겨있는 2CD 버전이다. 앨범 커버에는 “1987: 30th Anniversary Edition”이라고 쓰여있다.
앨범의 뒷면을 보자. 왼쪽에는 “1987” 오리지널 앨범의 리마스터된 트랙 리스트가, 오른쪽에는 당시 앨범 발매 직후 이루어진 1987-88 투어의 라이브 트랙 리스트가 보인다.
트랙 리스트보다 눈길을 끄는 게 있다.
앨범 뒷면 하단을 보면 CD1(오리지널 앨범)과 CD2(라이브 트랙)에 참여한 멤버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오리지널 앨범 레코딩 멤버는 다음과 같다.
- 보컬: 데이빗 커버데일(David Coverdale)
- 기타: 존 사이크스(John Sykes)
- 베이스: 닐 머리(Neil Murray)
- 드럼: 에인슬리 던바(Aynsley Dunbar)
그럼 이제 라이브 투어 멤버 명단을 볼까?
- 보컬: 데이빗 커버데일(David Coverdale)
- 기타: 애드리언 반덴버그(Adrian Vandenberg)
- 기타: 비비언 캠벨(Vivian Campbell)
- 베이스: 루디 사조(Rudy Sarzo)
- 드럼: 토미 올드리지(Tommy Aldridge)
“1987” 앨범을 녹음했던 뮤지션 중, 프론트맨이자 밴드의 리더인 데이빗 커버데일을 제외하고 모든 멤버가 교체된 것을 알 수 있다. 앨범 발매 후 몇 년이 지난 것도 아니고 앨범 직후 투어였음에도 레코딩 멤버 중 그 누구도 이어진 투어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오리지널 “1987” 앨범이 만들어질 때 생긴 일
셀프 타이틀 앨범(“Whitesnake”)으로도 불리는 “1987”은 화이트스네이크 역사상 상업적, 비평적으로 가장 성공한 앨범이다.
RIAA(미국 음반 산업 협회, Recording Industry Association of America)에 따르면 오리지널 “1987” 앨범은 발매된 1987년부터 1995년까지 미국내에서 8x 플래티넘, 즉 총 800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현재 정확한 전 세계 판매량의 출처를 찾기는 어렵지만 천만 장 혹은 2천만 장 이상이라고 설명하는 기사들도 있다. (위키피디아에는 본 앨범의 전 세계 판매량이 2천 5백만 장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집계 방식이나 출처는 불분명하다.)
메탈리카나 데프 레퍼드를 제외하고 헤비메탈 음악 장르에서 한 장의 음반이 이토록 크게 성공하는 경우는 보기 어렵다.
앨범의 성공 요인으로 데이빗 커버데일의 목소리를 꼽지 않을 수 없지만, 사실 이 앨범의 성공에 그에 못지 않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존 사이크스의 작곡과 기타 연주였다.
“1987: 30th Anniversary Edition”의 첫 번째 CD에는 총 11곡이 실려 있고, 그중 9곡이 데이빗 커버데일과 존 사이크스의 공동 작곡으로 되어 있다. 화이트스네이크의 기존 앨범에서 가져와 리메이크한 ‘Here I Go Again 87’과 ‘Crying in the Rain’만 존 사이크스가 작곡에 참여하지 않은 곡들이다.
그런데 리메이크된 ‘Crying in the Rain’에서의 존 사이크스의 강렬한 기타 연주를 듣는다면, 작곡에 참여하지 않은 이 곡에서조차 그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기 무척 어려워진다. “1987” 앨범 이후 존 사이크스 탈퇴 후에도 화이트스네이크의 라이브 공연에서 연주되는 버전은 그가 참여한 버전이라는 사실이 이 곡에 대한 그의 기여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1987” 앨범 발매 전후 발생한 데이빗 커버데일과 존 사이크스의 불화는 여러 매체를 통해 알려져 있으나 누구의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내용이 사뭇 다르다.
데이빗 커버데일이 미국 시장 공략에 초점을 맞추며 핵심 자원으로 영입한 존 사이크스는 적어도 “1987” 앨범의 녹음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이 전설적인 보컬리스트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엄밀히 말하면, 존 사이크스의 영입 시점은 1984년으로, “1987” 앨범의 전작인 “Slide It In”의 US 버전 제작 때였다. “Slide It In” UK 버전에 존 사이크스의 기타를 입힌 US 버전은 1985년 발표되었다.) 유튜브에는 “1987” 발매 전 커버데일과 사이크스가 함께 한 공연 영상이 여럿 공개되어 있다.
문제는 “1987” 녹음 과정에서 불거졌다.
데이빗 커버데일에 따르면, “1987” 앨범을 제작할 당시 그는 수술까지 필요한, 심각한 부비동염(축농증, sinus infection)을 앓고 있었다. 보컬리스트로서 재기가 가능할 지도 확실치 않은 상황이었다. “1987” 앨범의 보컬 파트 녹음을 위해 스튜디오로 돌아왔을 때도 이에 대한 불안감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존 사이크스는 이 상황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했다. 2017년 이루어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존 사이크스가 자신의 관점으로 술회한 당시 상황은, 커버데일이 마땅치 않은 온갖 구실을 대며 보컬 녹음을 미뤘다는 것이다.
둘 사이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고, 커버데일은 사이크스를 포함한 다른 멤버들이 컨디션 회복이 더딘 자신을 앨범 작업으로부터 배제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불화의 결과는 “1987: 30th Anniversary Edition” 뒷면 CD2 투어 멤버 명단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을 제외한 전 멤버 교체로 이어졌다.
최전성기 화이트스네이크가 남긴 불후의 걸작 “1987”
“1987”은 명불허전, 두고두고 들어도 질리지 않는 명반이자 걸작이다.
블루지한 하드록 연주가 담긴 화이트스네이크의 1982년 앨범 “Saints & Sinners”의 수록곡이자, “1987” 앨범에서는 더 세련된 편곡으로 연주된 ‘Here I Go Again 87’의 어마어마한 상업적 성공을 무시하기는 어렵지만, 본 앨범의 백미는 단연 ‘Still of the Night’와 ‘Crying in the Rain’이다.
부비동염의 악몽으로부터 완전히 깨어난듯 중저음의 음색으로 고공행진을 벌이는 커버데일의 보컬과, 폭발적이고 압도적인 사이크스의 기타 연주가 최적으로 결합된 이 두 곡은, “1987” 앨범이 웅장하고 거대한 스케일의 헤비메탈 음반이라고 인식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특히 ‘Here I Go Again’과 동일한 앨범에서 가져와 리메이크된, “1987”의 ‘Crying in the Rain’을 블루지한 원곡과 비교하며 들어보라. 리메이크 버전의 강렬함이 어느 정도인지 단박에 느낄 수 있다.
음표의 빈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 이 곡에서의 존 사이크스의 기타 솔로는 말 그대로 ‘울부짖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듣는 이에게 전율을 일으킨다. 이 분위기를 재현하기 쉽지 않은지, 존 사이크스 이후 화이트스네이크의 라이브 공연에서 87년 버전 ‘Crying in the Rain’의 기타 솔로를 원곡에 근접하게 재현 가능했던 기타리스트는 더그 올드리치(Doug Aldrich)뿐이었다.
더그 올드리치가 참여한 라이브 버전 ‘Crying in the Rain’ | 영상 출처: ‘Whitesnake TV’ 유튜브 채널(화이트스네이크 공식 채널)
그러나 ‘Still of the Night’과 ‘Crying in the Rain’ 외의 곡들이 형편없었다면 “1987” 앨범이 인상적인 결과물로는 기억되었을지 몰라도, 전설적인 앨범으로 남아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묵직하고 끈적한 슬로우 템포의 러브송 ‘Is This Love’와 ‘Looking for Love’도 좋고, 질주감 넘치는 기타 리프가 폭발적인 에너지를 전달하는 ‘Bad Boys’, ‘Children of the Night’, ‘You’re Gonna Break My Heart Again’ 같은 곡들도 빼놓을 수 없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1987: 30th Anniversary Edition”를 들으며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리지널 음반 자체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1987: 30th Anniversary Edition”의 CD2와 연관된 아쉬움이다.
앞서 언급한 커버데일과 사이크스의 불화로 앨범 발매에 이은 투어에는 레코딩 연주 멤버들이 전혀 참여하지 못했다. 특히, 존 사이크스의 불꽃같은 연주를 담은 라이브 트랙을 CD2에서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투어 멤버였던 애드리언 반덴버그와 비비언 캠벨도 하드록과 헤비메탈 씬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이지만, 본작에서 존 사이크스의 존재감이 너무도 강렬한 탓에 적어도 이 라이브 앨범에서는 안타까움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역사를 되돌릴 수도 없으므로 헛된 망상에 불과하지만, 가끔씩 존 사이크스가 여전히 함께한 화이트스네이크가 ‘Still of the Night’과 ‘Crying in the Rain’을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사실, 이 상상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존 사이크스가 화이트스네이크를 떠난 후 주도적으로 조직한 밴드 블루 머더(Blue Murder)나 그의 솔로 공연에서 이 두 곡은 자주 연주되었고, 그들의 라이브 앨범에도 실려있다. 상상의 절반은 이루어진 셈이다…)
참고 자료:
WHITESNAKE – Guitarist JOHN SYKES Discusses DAVID COVERDALE – “I Have No Interest In Ever Talking To Him Again” | BraveWords
How David Coverdale Returned From the Abyss With ‘Whitesnake’ | Ultimate Classic R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