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선생(그가 호감을 가진 여타 지식인들을 지칭할 때 늘 그러듯)을 처음 안 것은 군대시절이었다. 소위 '짬'이라는 것이 좀 차고 일과 시간 후 여유시간이 드디어 볕을 보기 시작했을 때, 부대 내 독서실(이라고 해 봤자 서너 평 남짓의 공간이었지만)에서 우연히 접한 책이 그의 저작이었다. 책의 제목은 정확히 기억 나지 않는데(어둑한 기억을 더듬어 본 결과 그 책은 아마도 이었을 것이다), 솔직히 책의 내용보다 토종 한국인보다 한국어를 훨씬 잘 구사하는 귀화인의 존재가 신기하기도 했고 존경스럽기도 했다. 물론 '한국인'이 아닌 '귀화인'이라는 단어를 그가 듣는다면 탐탁지 않게 여기리란 걸 알지만. (이하 )는 박노자 선생이 인터넷에 올려왔던 에세이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짧은 글마다 그때그때 저자의 주변..
과학과 미학 양 분야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큰 인지도를 얻고 있는 두 저자, 정재승과 진중권이 "크로스!"를 외쳤다. 혹시 영화 를 보고 '삘' 받아 서로의 몸을 해체, 결합 해보려는 시도가 아니냐고? 그랬다면 더욱 흥미로웠겠지만 아쉽게도 (이하)는 이들이 의기투합해 쓴 책의 제목일 뿐이다. 제목만 듣고 잠시나마 물리법칙의 혁신과 생명공학의 진보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그러나 이 부러운 두 두뇌의 결합만은 얼마간 이뤄진 셈이다. 는 시대를 대표하는 스물 한 개의 아이콘을 바라보는 두 저자의 시각을 번갈아 기록하고 있다. 이 기호들은 주로 각 저자의 주 활동무대, 즉 과학과 미학이라는 배경 안에서 분류돼 서술되고 있지만 때론 서로의 영역이 교차되기도 한다("크로스!"). ..
누군가를 엿본다는 것은 대개 지루함과는 거리가 먼 행위다. 아마도 인간의 무의식 어딘가에 타인에 대한 호기심이라는 영역이 깊숙이 잠재하고 있으리라. 더욱이 그 대상이 무척 흥미롭거나 신비로울 때 그 호기심의 세기는 훨씬 커진다. 그래서 우리는 일견 고리타분하게 여기면서도 때가 되면 어김없이 명사의 자서전, 에세이류를 찾거나 말초적인 자극 말고는 얻을 게 없다는 걸 앎에도 연예인의 가십기사를 둘러보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숱한 소설 속 가상의 세계에도 질려 버리고 사회과학서적류에 적혀있는 이념들에 머리가 아픈 독자들이 호기심의 덫에 걸려드는 순간이다. (이하 )는 일본이 자랑하는 영화감독이자 코미디언 기타노 다케시의 짧은 에세이들을 모은 책이다. 그에게 호기심을 가진 이라면 살짝 엿볼 만 하다. 이른바 자..
마음 같아선 피곤에 뻗어 누운 밤 시간, 머리맡에 둔 한 권의 책 내용을 동 트기 전까지 뇌로 자동 전달해 주는 기계를 발명하고 싶을 때가 있지만, 하루 종일 시달리다 이 고요한 시간만큼은 휴식을 취하고픈 뇌의 고충을 외면하기 어려울뿐더러 마치 인체를 활용한 데이터전송 같은 비인간적인 개념을 떠올렸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아 기꺼이 포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진심으론, 뇌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고 인간의 신체에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누군가 그런 기계를 만들어 준다면 잘 써줄 의향은 있다. 물론 구매 시 무이자 할부 6개월을 넘기지 않아도 될 만큼 가격 장벽이 낮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책 읽을 시간, 더 정확히는 그럴 마음의 여유를 찾지 못하겠다는 유치한 투정을 해보려다 이런 어이 없는 상상을 했다. 그것은 ..
아사다 지로의 단편집이다. 영화 을 보고 원작을 읽고 싶어 들춰본 책이다. 책 속엔 단편집의 제목이기도 한 이 첫 번째로, 의 원작인 가 두 번째 이야기로 실려 있다. 뿐 아니라 도 영화로 먼저 접했다. 한때 히로스에 료코를 참 좋아해서 그녀가 출연한 영화, 드라마 등을 보곤 했는데 도 그 리스트에 끼어 있었다. 영화 은 그러니까 아사다 지로나 다카쿠라 켄의 이름값 덕분에 본 건 아니었다. 영화를 본지가 오래되어 세밀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역사의 따뜻한 난로 곁에 앉아 흰 눈이 쌓인 철로 주변을 가만히 바라보는 듯한 포근한 분위기나, 이야기가 끝난 뒤에 전해지는 뭉클한 감정은 영화나 원작소설이나 다를 바가 없다. 영화는 소설의 장면 장면을 충실히 화면에 담으려 했던 것 같고, 아사다 지로의 문장 또한 머..
* 스포일러 포함 소년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와 만난다. 성숙한 여인의 육체를 경험하고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고 대화를 나누다 집에 돌아와 온통 그녀의 모습으로 가득한 꿈을 꾼다. 그것은 불과 15년을 살아왔을 뿐인 그에게 마치 거대한 우주의 시작이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이 낯선 감정의 정체는 뭘까. 20년의 나이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다면 소년은 그녀를 사랑했다. 의 처음 부분, 그러니까 미하엘과 한나가 서로 알게 된 후 사랑을 나누고 책을 읽고 하는 만남을 큰 장애물 없이 계속해 나갈 때, 나는 이 이야기가 금기를 깨는 사랑을 다루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어머니와 아들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여행을 하다 머무는 숙소에서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