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에 이어 “Slip of the Tongue” 앨범으로 ‘백투백 홈런’을 친 화이트스네이크
“1987”의 어마어마한 성공에 비하면 소소하게 보이지만, 이 음반에 이어 발표된 화이트스네이크의 1989년 앨범 “Slip of the Tongue” 역시 상업적으로 성공적인 결과물이었다.
RIAA(미국 음반 산업 협회, Recording Industry Association of America)의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Slip of the Tongue”은 1990년까지 미국 시장에서 플래티넘, 즉 100만장의 판매고를 달성했다. 만루 홈런까지는 아니라도 지난 타석(“1987”)에 이은 ‘백투백 홈런’이라 여길 만하다. (엄밀히 말하면, 밴드의 1984년작 “Slide It In” 이후 세 장의 앨범이 모두 성공적이었으므로, ‘백투백투백 홈런’에 비유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RIAA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Slide It In” 앨범은 1992년까지 미국 시장에서 더블 플래티넘을 달성했다. 위키피디아에는 “Slide It In”이 전 세계적으로 6백만장, “Slip of the Tongue”은 4백만장이 판매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아래 글에서 쓴 것처럼, 밴드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었던 “1987” 앨범 발매 후 데이빗 커버데일은 연주 멤버를 모조리 교체한다. 앨범의 투어가 시작되기도 전이었다.
그리하여 “1987” 투어 멤버는 다음과 같았다.
- 보컬: 데이빗 커버데일(David Coverdale)
- 기타: 애드리언 반덴버그(Adrian Vandenberg)
- 기타: 비비언 캠벨(Vivian Campbell)
- 베이스: 루디 사조(Rudy Sarzo)
- 드럼: 토미 올드리지(Tommy Aldridge)
데이빗 커버데일은 이 투어 멤버 중, 비비언 캠벨을 제외한 모든 멤버와 함께 다음 앨범 제작에 돌입한다.
“1987”을 이은 앨범에서, 전 앨범의 핵심 임무를 수행했던 존 사이크스(John Sykes)와 비슷한 역할을 할 사람은 누구였을까?
데이빗 커버데일은 새 앨범의 작곡 파트너로, “1987”의 투어 멤버이자, 전 앨범의 메가 히트곡 ‘Here I Go Again 87’에서 기타 솔로를 연주했던 네덜란드 출신의 기타리스트, 애드리언 반덴버그를 선택한다.
애드리언 반덴버그는 “Slip of the Tongue” 앨범에서 화이트스네이크의 기존 곡을 리메이크한 ‘Fool for Your Loving ‘89’을 제외한 모든 곡의 작곡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1987”에서의 존 사이크스의 경우보다 더 견디기 힘든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손목 부상으로 자신이 작곡한 곡들의 기타 파트를 연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애드리언 반덴버그의 빈 자리를 채운 것은 알카트래즈(Alcatrazz)와 데이빗 리 로스(David Lee Roth) 밴드를 거친, 당시 떠오르는 기타 비르투오소 스티브 바이(Steve Vai)였다.
스티브 바이는, 그전까지 점차 옅어지기는 했어도 “1987” 앨범까지 남아있던 화이트스네이크의 블루지한 음악 스타일과는 사뭇 다른 성향의 연주자였다.
그가 어느 매체와 가졌던 한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데이빗 커버데일은 기타 파트를 녹음할 스티브 바이에게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라’는 주문을 했다고 한다. 1
본 모습을 숨기지 않았던 스티브 바이의 색깔이 강하게 스며든 “Slip of the Tongue”은, 앞서 말한 것처럼 화이트스네이크의 성공을 이어갔다. 앨범 발매 후, 이번에는 전작 “1987” 같은 투어 멤버 교체가 없었다. 레코딩 멤버들에 더해, 부상으로 앨범 녹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애드리언 반덴버그도 투어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화이트스네이크 앨범 중 가장 이질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세련된 앨범
“1987” 30주년 기념 앨범과 마찬가지로, “Slip of the Tongue”도 2019년에 30주년 기념 앨범이 발매되었다. 앨범 구성 역시 전작의 그것처럼 다양한 버전이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2CD 버전으로, CD1에는 원작의 리마스터된 트랙들과 일부 믹싱을 달리한 버전의 트랙들이 담겨 있고, CD2에는 Monitor Mixes라는 부제의, 레코딩 당시 완성되지 않은 상태의 트랙들이 실려 있다. CD2에는 “Slip of the Tongue” 앨범에 최종적으로 실리지 못한 미발표 곡들도 있어 팬들이라면 흥미롭게 들을 만하다.
“Slip of the Tongue”은 전작 “1987”과는 여러모로 다른 색깔의 앨범이지만, 몇몇 트랙들은 묘한 기시감을 불러 일으킨다.
긴장감과 긴박감을 쌓아가는 기타 리프와 고음역대의 보컬이 특징적인 ‘Slip of the Tongue’과 ‘Judgment Day’는 “1987”의 ‘Still of the Night’과 ‘Crying in the Rain’을, 미드 템포의 러브송 ‘Now you’re Gone’과 ‘The Deeper the Love’는 ‘Here I Go Again 87’과 ‘Is This Love’를 연상시킨다. 기타 리프도 보컬 멜로디도 서로 다르지만, 나에게는 이상하게 “1987”과 “Slip of the Tongue”의 많은 곡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들릴 때가 있다.
내가 이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트랙은 화이트스네이크의 1980년 앨범 “Ready an’ Willing”으로부터 가져와 새롭게 편곡한 ‘Fool for Your Loving ‘89’이다.
넘실대는 그루브와 정감 있는 기타 솔로가 있는 원곡도 나쁘지 않지만, 리메이크된 ‘Fool for Your Loving ‘89’의 세련된 편곡과 스티브 바이 특유의 스케일이 녹아 있는 기타 솔로는 언제 들어도 좋다.
“1987”이 존 사이크스의 강렬한 연주에 힘입어 웅장한 헤비메탈 음반으로 완성되었다면, “Slip of the Tongue”은 전작의 성공 덕분에 할 수 있었던 색다른 시도가 거침없이 반영된 앨범이 되었다. 그리고 적어도 그 ‘색다른 시도’의 지분 대부분은 스티브 바이의 기타가 가지고 있다.
하드록과 헤비메탈 계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스티브 바이의 독특한 기타 사운드는 “Slip of the Tongue”을 감상할 때 굉장히 ‘세련되다’라는 느낌을 갖도록 만든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세련되다’는 ‘서투르거나 어색한 데가 없이 능숙하게 잘 다듬어져 있다’ 혹은 ‘모습 따위가 말쑥하고 품위가 있다’라는 뜻으로 정의된다. 기존의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을 자신감 있게 드러냈기 때문일까. 이 앨범에서 스티브 바이의 연주는 ‘잘 다듬어져’ 있을 뿐 아니라 ‘말쑥하고 품위가 있다’.
물론, 대부분의 곡을 작곡한 데이빗 커버데일과 애드리언 반덴버그의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커버데일은 밴드의 리더로서 그들의 곡에 스티브 바이라는 독창적인 색을 입히는 실험적이고 과감한 결정을 내렸고, 반덴버그는 커버데일의 작곡 파트너로서 이 상업적이면서도 비평적으로 성공한 결과물의 견고한 기반을 마련했다.
참고 자료:
'Very, Very Frustrating': Ex-Whitesnake Guitarist Opens Up on Steve Vai Playing His Parts on 'Slip of the Tongue', Explains How His Relationship With Vai Changed | Ultimate Guitar
- ’Do whatever you want’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