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비극 중 하나였던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홀로코스트는 20세기 숱한 헐리웃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실화라는 강력한 흡인력의 도구를 밑에 깔고서, 상상하기도 어려운 인간의 야만성과 생존력, 그리고 역사의 교훈을 이야기에 함께 담아낼 때면 대개의 관객들은 살육의 현장이 일으키는 경악과 그러한 공간에 살고 있지 않다는 안도 사이의 감정으로 스크린을 바라보곤 했다. 헐리웃, 아니 미국사회 전반에 대한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현실이 이런 영화들의 제작과정에 입김을 불어넣었음은 쉬이 유추할 수 있는 사항이다. 이런 보이지 않는 지원과 함께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들은 상업영화의 카테고리 안에서 전쟁영화로서의 스펙터클과 감동의 드라마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에드워드 즈윅 감독이 오랜 세월 준비해..
잭 스나이더의 전작인 은 이야기야 어쨌든 눈 앞에 펼쳐진 시각적 황홀함에 맘껏 도취될 수 있는 영화였다. 감독의 의도가 그래픽 노블인 원전의 완벽한 재현인지 아니면 그저 압도적인 비주얼에 대한 탐닉인지 그 속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스크린 안의 왜곡된 속도와 장렬한 육체로 수식된 액션씬을 바라보고 있자면 보는 이의 뇌 속엔 이미 공허한 이야기에 대한 불평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다. 영화가 차용한 역사의 한 조각은 원작만큼이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을 테지만 그것이 어떤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적어도 러닝타임 동안은 말이다. 이는 이라고 그다지 다르지 않다. 영화엔 여전히 그래픽 노블이 가진 스타일에 대한 충실한 해석이 묻어나고 그 안에서 역사가 뒤틀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암울한 슈퍼히어로 이야기에..
여기 영광의 시절은 모두 지난 한 프로레슬러가 있다. 대전료는 쥐꼬리만하고 몸은 무분별한 약물사용으로 인해 심장마비가 올만큼 노쇠했다. 밀리기 일쑤인 트레일러 임대료를 꼬박꼬박 내기 위해선 파트타임으로 근무하는 슈퍼마켓 지점장의 모욕적인 언사도 한쪽 귀로 흘려야 한다. 젊은 시절의 과오로 딸과의 관계는 최악. 마음 가는 스트리퍼는 손님과는 데이트하지 않는다며 호감을 거절한다. 냉랭한 현실을 견딜 진통제가 있다면 얼마 되지도 않는 레슬링 관중들의 환호. 그것은 주인공 랜디(미키 루크)로 하여금 과거 좋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차가운 바깥세상으로부터 그를 보호할 유일한 방어막이 된다. 레슬링은 돈도 가족도 건강도 잃어버린 이 사내가 하루하루를 견디는 원동력이다. 그런가 하면 여기 영광의 시절이 ..
식당에 가면 과식의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는 음식을 남기지 않는 편이다. 함께 식사를 하는 가족과 친구들은 종종 나에게 핀잔을 준다. 그 핀잔의 내용은 음식을 조금 남기는 편이 먹을 것에 대한 초연한 태도를 드러내 먹는 이의 사회적 지위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는 농담 섞인 것에서부터 이런 행동이 제어되지 않는 습관이 될 경우 맞을 수 있는 내 건강상의 문제에 대한 걱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래서 항상 음식을 다 먹으려 하지 말고 적당히 조절하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이게 잘 되지 않는다. 아마도 어린 시절 먹을 것에 대한 집착과 남겨진 음식에 대한 아쉬운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시작된 이 행위가 우려했던 대로 이미 습관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리라. 그러니까 나의 이런 행동이 저 멀리 아프리카 남부 어느 스러..
책을 다 읽고 역자후기를 본다. 유독 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의 글을 어렵게 생각하는 이들을 ‘매스미디어의 《계시》에 힘입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에 길들여 있는 사람들’로 여긴다고 한다. 이 문장이 도드라지게 보이는 이유는 명백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펼친 은 ‘쉽게 생각하는 것에 길들여’진 나 같은 독자에게 결코 친절한 저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짧은 글들을 모아놓은 만큼 글마다의 편차는 있지만 몇몇 글은 신학과 철학과 문학을 비롯한 인간이 만들어낸 그 모든 지적 축적물의 얼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책의 제1부에 해당하는 부분은 작가의 일상과 다양한 경험을 유머와 풍자와 패러디로 포장해 읽기 쉽게 진행된다. 물론 이 안에도 작가 특유의 수많은 ..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 안에서라면 쉽게 접할 수 없는 특정 전문분야, 이를테면 도박이라든가 사기꾼들의 세계, 혹은 마약밀매범들의 생리 등을 다룬 영화들의 어려운 점은 바로 그 생소한 세계를 관객들에게 어떻게 펼쳐 보여주느냐는 데에 있다. 그래서 시나리오 작가를 비롯한 제작진들은 그들의 세계를 직접 들여다보고 취재하며 가능한 실감나는 세계를 재현해내려 노력한다. 한마디로 우리가 잘 모를 그것일지라도 그 세계를 결코 허황되지 않게, 그리고 제작진들의 발에 찬 땀이 느껴지도록 만들어내야만 하는 것이다. 마치 진짜일 것만 같은 영화 속 재현이 관객으로 하여금 그 분야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한다. 앞의 소재들이 나 , 같은 영화들을 통해 관객들에게 무척 흥미롭게 다가갔음을 부정할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