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못한 상황과 우연한 사건이 잔뜩 벌어지는 TV 드라마를 ‘막장’이라 부르곤 있지만, 실은 우리의 삶이 더욱 우연에 노출되어 있다. 호르몬이 왕성하게 분비되는 청소년 시기의 어느 날, 저녁때까지 넉넉히 남은 시간에 친구를 초대해 침을 꿀꺽 삼키며 성인 비디오를 트는 순간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는 부모님을 맞이하는 것도 우연, 길가다 스타일 좋고 나보다 키도 한 뼘쯤 더 큰 남자의 팔짱을 낀 채 행복한 표정을 짓는 전 애인을 마주치는 것도 우연, 3주 연속 로또 5등에 당첨되어 기약 없는 일등 당첨을 상상하게 하는 일도 어찌 보면 우연의 산물이다. 근데 이렇게 삶을 지배하는 우연이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에만 들어가면 맥을 못 춘다. 개연성과 현실감을 들먹이며 퇴출시켜야 하는 못된 녀석이 된다. 그래서 ..
시종일관 이를 단단히 씹으며 내뱉는 대사들. 높은 음이 전혀 섞이지 않은 낮은 목소리. 잔뜩 찌푸린 미간. 의 까다로운 노인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온몸으로 인물의 성격을 드러낸다. 아내의 장례식에서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신부를 미덥지 않게 여기고 생전의 아내가 그에게 부탁한 고해성사도 할 생각이 없다. 아들들은 물론 손자들과의 관계 또한 딱딱하기 그지없으며 베트남 흐멍족인 이웃들과 간단한 인사조차 나누지 않는다. 단단한 고집에 욕과 불평을 입에 달고 사는 이 노인네를 주변인들이 싫어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던 어느 날 편견과 아집으로 똘똘 뭉친 이 코왈스키의 삶에 이웃집 흐멍족 소년 타오(비 뱅)와 그의 누나 수(아니 허)가 끼어든다. 베트남계 불량배와 흑인 건달들에게 괴롭힘 당하던 ..
인류의 비극 중 하나였던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홀로코스트는 20세기 숱한 헐리웃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실화라는 강력한 흡인력의 도구를 밑에 깔고서, 상상하기도 어려운 인간의 야만성과 생존력, 그리고 역사의 교훈을 이야기에 함께 담아낼 때면 대개의 관객들은 살육의 현장이 일으키는 경악과 그러한 공간에 살고 있지 않다는 안도 사이의 감정으로 스크린을 바라보곤 했다. 헐리웃, 아니 미국사회 전반에 대한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현실이 이런 영화들의 제작과정에 입김을 불어넣었음은 쉬이 유추할 수 있는 사항이다. 이런 보이지 않는 지원과 함께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들은 상업영화의 카테고리 안에서 전쟁영화로서의 스펙터클과 감동의 드라마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에드워드 즈윅 감독이 오랜 세월 준비해..
잭 스나이더의 전작인 은 이야기야 어쨌든 눈 앞에 펼쳐진 시각적 황홀함에 맘껏 도취될 수 있는 영화였다. 감독의 의도가 그래픽 노블인 원전의 완벽한 재현인지 아니면 그저 압도적인 비주얼에 대한 탐닉인지 그 속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스크린 안의 왜곡된 속도와 장렬한 육체로 수식된 액션씬을 바라보고 있자면 보는 이의 뇌 속엔 이미 공허한 이야기에 대한 불평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다. 영화가 차용한 역사의 한 조각은 원작만큼이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을 테지만 그것이 어떤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적어도 러닝타임 동안은 말이다. 이는 이라고 그다지 다르지 않다. 영화엔 여전히 그래픽 노블이 가진 스타일에 대한 충실한 해석이 묻어나고 그 안에서 역사가 뒤틀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암울한 슈퍼히어로 이야기에..
여기 영광의 시절은 모두 지난 한 프로레슬러가 있다. 대전료는 쥐꼬리만하고 몸은 무분별한 약물사용으로 인해 심장마비가 올만큼 노쇠했다. 밀리기 일쑤인 트레일러 임대료를 꼬박꼬박 내기 위해선 파트타임으로 근무하는 슈퍼마켓 지점장의 모욕적인 언사도 한쪽 귀로 흘려야 한다. 젊은 시절의 과오로 딸과의 관계는 최악. 마음 가는 스트리퍼는 손님과는 데이트하지 않는다며 호감을 거절한다. 냉랭한 현실을 견딜 진통제가 있다면 얼마 되지도 않는 레슬링 관중들의 환호. 그것은 주인공 랜디(미키 루크)로 하여금 과거 좋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차가운 바깥세상으로부터 그를 보호할 유일한 방어막이 된다. 레슬링은 돈도 가족도 건강도 잃어버린 이 사내가 하루하루를 견디는 원동력이다. 그런가 하면 여기 영광의 시절이 ..
요사이 ‘허세’라는 말이 유행인가보다. 사전적 의미로 ‘실상이 없는 기세’를 일컫는다. 겉으론 강한 척, 무언가 있는 척 하지만 알고 보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란 얘기다. 의 강재(최민식)가 그런 인간이다. 조직동기는 벌써 보스가 되었는데 그는 업소 ‘삐끼’와 ‘웨이터’ 사이에서 선택할 권리도 부여 받지 못한 말단 조직원이다. 겉으론 의리와 충심 빼면 시체라는 이 세계에서 까마득한 후배들에게조차 인사를 받지 못하고 사채 빚 독촉협박작업에 함께 따라갔다가 방해만 된다며 ‘쿠사리’만 듣는다. 유일하게 그가 머물 자리였던 비디오 대여점은 구치소를 며칠 갔다 온 사이 다른 후배놈이 꿰찼다. 말이 조직원이지 나이만 먹었을 뿐 어디에서도 반기지 않는다. 그래서 강재는 더욱 허세를 부린다. 안이 빌수록 나이를 들먹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