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겔레르트 언덕에서 곧장 호텔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부다 지구 아래쪽까지는 버스를 타고 내려왔고, 거기서부터 다리 건너 페스트 지구까지는 걸어왔는데, 야경을 이대로 두고 바로 잠을 청하기는 아쉬워 강 건너 부다 왕궁이 뿜는 빛을 한 시간 남짓 감상했다. 내 보잘것없는 사진 실력으로 이 불빛을 담아내긴 역부족이었지만, 눈으로라도 더 봐둬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다. 도나우 강변엔 추운 밤 바람에도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개를 데리고 나온 시민들. 왁자지껄하게 젊음을 뽐내는 청년들. 나처럼 여행자의 것처럼 보이는 두툼한 백팩을 등뒤에 맨 채 왕궁을 바라보거나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왕궁 사진을 몇 장 찍어보다 초점도 맞지 않고 손도 차가워져 그만두고 주변 사람들을 구경했다. 부다 왕궁의 빛. 그것은 ..
어부의 성채를 벗어나 부다 왕궁(Buda Castle, Budavári Palota) 쪽으로 걸어 나왔다. 머리 속에서 왕궁까지 걸었던 경로가 희미하다. 왕궁 주변에 위치한 날개를 편 투룰(Turul) 상과 말을 탄 외젠 왕자(Prince of Savoy-Carignan, François Eugène)의 청동상을 본 기억이 또렷한데 거기까지 가는 순간에 대한 기억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왜 잊은 걸까. 인도 바닥의 조각난 보도블록이 눈에 잠깐 스친 것도 같고, 살갗에 닿는 차가운 바람과는 어울리지 않았던 환한 볕도 생생한데, 어떤 경로로 외젠 왕자 앞에 서게 되었는지는 떠올려지지 않는다. 시간을 거슬러 그 망각의 이유를 찾다 보니, 한 생각이 떠올랐다.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날 잠자기 전 구상한 다음날의 ..
요즘 내가 책을 구입하는 경로는 아래 네 가지로 나뉠 수 있다. 1) 회사의 도서지원금으로 책을 구입할 때다. 이땐 예스24를 이용한다. 2) 개인적으로 종이책을 구입할 때다. 알라딘을 통해 도서를 구입한다. 3) 전자책을 구입할 때다. 초기엔 알라딘에서 전자책을 구입하다, 최근엔 리디북스를 애용한다. 4) 오프라인 서점에서 책을 산다. 이중 오프라인 서점을 이용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서점에 가면,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풍기는 아늑함과, 지식이 집약된 장소가 주는 풍성함을 동시에 느낀다. 이 느낌이 좋다. 하지만 이미 사기로 결정한 책이 있는 경우엔, 단지 그 도서를 구입할 목적으로 서점에 가는 일은 없다. 온라인 서점에서 저자와 책 제목만 입력하여 클릭 몇 번으로 책을 구입해 배송 받는 게 무척 ..
어느덧, 요즘 사무실에서 문서 작업을 주로 하는 직장인이 쓸만한 노트북은 어떤 게 있을까, 인터넷 쇼핑몰을 둘러볼 시기가 되었다. 회사에서 일을 마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조차 업무를 흘리고 다니는, 칠칠치 못한 직장인(바로 내 얘기다.)이라면 적당히 큰 디스플레이에 가벼운 노트북이 쓰기에 알맞을 게다. 회사에서 게임을 즐길 일도 없으니 외장 그래픽 카드도 필요 없을 터이다. 다만 요즘 많이 쓰이는 SSD 정도는 장착되어 있어야 빠른 시일 내에 노트북을 교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 요즘 2년여 사용한 소니 노트북이 많이 느려진 것을 HDD 탓으로 돌리고 있는 중이다. 노트북을 바꿀 핑계거리가 생겼다. 애플의 맥북에어 이후로 봇물 터지듯 출시되는 울트라북 노트북 모델들은 모두 가벼운 무게..
신발은 밤새 잘 말랐다. 동유럽의 겨울은 바깥이 충분히 추워서인지 어느 실내든 들어서면 따뜻한 기운이 충만했다. 밤새 뜨끈하게 틀어놓은 히터가 신발은 물론이고 옷가지에 스민 습기를 모두 먹어 치웠다. 둘째 날에도 비가 온다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점점 질척해지는 신발을 신고 거리를 걸어야 할 터였다. 일어나니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다. 방으로 스며드는 햇살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다행이다'라고 외쳤다. 잠들기 전 내일의 날씨가 맑기를 잠깐 기도했던 것도 같다. 낯선 곳에서 맞는 아침은 오묘한 느낌을 준다. 처음 보는 창 밖의 풍경이 비현실적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 바라보던 곳이 아니기 때문에 어색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다. 부다페스트에서 맞는 둘째 날 아침의 창 밖 풍경은 빗방울이나 안개가 시야를 방해하지 ..
2011년 말, 유럽에 가게 된 것은 장기출장 덕분이었다. 밤이 되면 세상이 사라지듯 컴컴해 지는 겨울의 동유럽에 머무는 동안, 긴 크리스마스 연휴엔 주변국 몇 도시를 돌아봐야겠다 마음 먹었다.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어 그리 멀지 않고 큰 비용도 들지 않을 곳을 검색했다. 여행이란 세세한 목적도 거창한 목표도 없이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라 생각하는 나에게 적합한 곳이었으면 했다. 우선 부다페스트가 떠올랐다. 그리고 곧 이어 파리가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여행지는 절반은 즉흥적으로 정해졌다. 두 도시의 호텔을 검색하여 예약하고 기차표와 비행기표를 구입한다. 이 두 가지만 제대로 해 놓으면 별다른 걱정은 없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날,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에서 부다페스트로 가는 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