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시선 신경 쓰지 말고 생긴 대로 당당하게 살아라!’가 어린이 관객들을 위한 ‘슈렉 시리즈’의 기본 모토이긴 해도, 성인 관객들을 혹하게 만든 이 녹색 괴물의 매력을 설교조의 교훈에 묻히게 만드는 건 이 시리즈에 대한 기만이다. 적어도 머리 큰 팬들은 그런 고리타분한 메시지가 아니라, 낡은 것을 패러디하고 기대되는 것의 전복을 꾀하는 ‘슈렉’의 기발함에 더 집중할 테니까. 동화 속의 들러리들을 주인공을 위시한 주요 등장인물로 앉혀놓고 과거의 찬란했던 주인공들을 비웃음의 대상으로 전락시켜버리는 그 발상의 전환. 그게 어른들이 이 ‘깜찍한’ 녹색 커플의 모험에 열광하는 이유다. 그러나 뭐든지 두어 번 뒤집고 나면 결국 눈앞에 있는 건 제자리로 돌아온 원본이다. 아니면 더 이상 뒤집을 구석이 남아 있지 ..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감정이 없는 인간과 만난다는 것은 그자체로 은근한 공포다. 굳이 싸이코패스같은 용어를 들먹이지 않아도 일상에서 감정 없는 사람들을 겪는다는 것이 얼마나 당혹스러울 지는 쉽게 상상이 간다. 인간의 특권과도 같은 감정을 우리의 몸에서 제거해 버리면, 남는 것은 기계와도 같은 차가운 두뇌뿐이다. 그것은 응당 사람에게서 풍겨 나와야 할 사람의 냄새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예상되는 것의 부재는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그것은 간혹 공포가 된다. 일본 소설(貴志祐介의 )을 원작으로 한 신태라의 은 그 공포의 극단을 보여주려 한다. 정념이 없는 것을 넘어 타인의 신체(자신의 신체도)를 마구 훼손하는 싸이코패스는, 영화에선 전준오(황정민)에 의해 일말의 동정의 여지가 ..
『본 얼티메이텀』이 폴 그린그래스의 『본 슈프리머시』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말은 비단 그의 연출 스타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본 얼티메이텀』은 정확히 전작의 마지막(더 정확히는 엔딩의 전 장면)에서 출발한다. 전편들을 보지 않았더라도 이 영화의 매력을 느끼는 데에 큰 지장은 없지만, 적어도 『본 슈프리머시』정도는 한번 쯤 확인하고 본 영화를 보는 것이 보는 이의 만족감을 배가시킬 것이다. 게다가 제작진은 『본 얼티메이텀』의 중간에 『본 슈프리머시』의 엔딩을 삽입하는 영리함을 보여 주기도 하며, 이것이 이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작용한다. 이 대목에서 작은 탄성을 지른 것은 과연 나뿐일까? 시리즈 전편이 일정이상의 완성도를 보여주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속편들이 첫작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경우..
『본 슈프리머시』가 『본 아이덴티티』와 다르게 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전편에 비해 비약적으로 강조된 액션의 강도 때문일 것이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카메라는 등장인물들의 긴장감과 불안함을 표현하는 도구가 되며, 액션에 좀 더 몰입할 수 있도록 관객을 도와주는 촉매역할을 한다. 현란한 카메라웍과 편집은 액션의 속도와 물리적 현상에 왜곡을 가한다. 그 덕에 제이슨 본이 펼치는 액션은 엄청난 완력의 맞부딪침으로 승화되었다. 마치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힘들의 대결. 내 눈엔 이것을 현실적이라 말하는 이가 오히려 이상해 보인다. 『본 슈프리머시』의 액션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고, 그래서 더 빠져들 수밖에 없다. 영화는 조용히 살고 싶었던 제이슨 본을 다시 음모의 바다로 끌어들이기 위해 연인의 죽음과..
진지하고 고뇌하는 스파이의 개과천선 이야기 『본 아이덴티티』는 표면상으론 국가의 이익에 매몰된 개인의 정체성을 찾는 주인공을 묘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을 깨닫지 못한 수퍼히어로의 자각을 다룬 영화 같기도 하다. 주인공 제이슨 본(맷 데이먼)은 망각의 어둠속을 헤매면서도 이미 몸으로 체득해버린 놀라운 능력들을 자신도 모르는 새에 하나 둘 꺼내놓는다. 영화 초반 제이슨 본이 스위스에 도착한 후 공원에서 순찰중인 경찰들을 만났을 때, 비로소 그의 첫 번째 능력이 발휘되는데, 그는 곧 1대 다수의 격투에도 능하고 다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매사에 주도면밀한 것으로 밝혀진다. 영화가 그 모든 것을 조금씩 보여주는 방식은 마치 빨간 복장 이전의 피터 파커가 스스로의 능력을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과 비..
나에게 극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두 번 씩 강요하는 영화들은 많지 않았다. 침침한 기억을 두서없이 더듬어보자면, 장 피에르 주네의 『에이리언4/Alien:Resurrection』와 김지운의 『장화, 홍련』이 그랬고,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花火』와 박찬욱의 『올드보이』가 그랬다. 그러고 보니 최근의 기억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최동훈의 『타짜』를 제외한다면. 혹자는 이해가지 않는 행동이라 말하는 ‘극장에서 같은 영화 두 번 보기’는 거대한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어둠속의 환상을 그 모습 그대로 조금이나마 더 오래 간직하고자 하는 욕심일 것이다. 어차피 영화는 영화제, 회고전 등의 특수한 상황이 아닐 경우 개봉 후 단 한 차례만의 상영기간을 가질 뿐이고, 이것은 좋은 추억을 그저 흘러가게 놔두는 것과 마찬가..
* 단축키는 한글/영문 대소문자로 이용 가능하며, 티스토리 기본 도메인에서만 동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