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읽다 보면 ‘재’와 ‘잿빛’이라는 단어가 높은 빈도로 등장한다. 남자와 소년이 걷는 길은 온통 재로 뒤덮여 있고 물에 떠있는 것도, 바람에 날리는 것도 재, 멀리 보이는 건물들의 외양을 묘사할 수 있는 색깔도 오로지 잿빛뿐이다. 친절히 설명해주지 않아도 독자는 이 세계가 무언가 거대한 사건이 한 차례 휩쓸고 간 폐허와 동의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이 무채색의 공간에서 남자와 소년은 무엇을 위한 생존인지도 모른 채 해변을 찾아 떠난다. 남자는 사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를 죽음으로부터 떨어뜨려 놓는 것은 오로지 소년뿐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세계에서 홀로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과거 이곳에서 인간들이 살았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발길을 옮기는 거리마다 말라 비틀어진 뼈들..
서로 다른 감독들이 연출한 옴니버스 영화나 같은 이런 테마소설집들의 장점은 각기 다른 개성들이 모여있는 만큼 그 다양성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작가들간을 비교하거나 그들에 대한 감상자로서의 호부를 피해갈 수 없기도 하다. 여러 작품을 읽으며 느끼는 좋고 나쁨의 차이. 어떤 것은 버려지고 어떤 것은 선택되는 취사선택의 유혹. 말하자면 이런 형식의 결과물들을 감상하는 것은 많은 창작자들 가운데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작가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이면서도 동시에 거리를 둘 대상을 솎아내는 과정도 동반한다. 에는 모두 9명의 작가들이 써낸 짧은 소설들이 수록되어 있다. 모두 나이를 가리키는 ‘서른’이라는 숫자를 소재로 탄생된 단편들이다. 각 소설들은 이 소재를 드러내는 방식이 각기 달라서 어떤 ..
요즘 보면 댓글이벤트라는 게 있다. 어떤 상품의 광고페이지나 리뷰글 하단에 불특정 다수가 간단한 글을 남기면 무작위로 추첨하여 해당 상품을 가져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추첨 상황이 공개되지 않은 만큼 투명성을 얼마나 보장할지는 업계관계자가 아니라면 아무도 모른다. 이런 불확실성 때문인지 아무 글이나 남겨도 되는 이 댓글란에는 해당 상품에 대한 섣부른 기대감, 혹은 더 나아가 써보지도 않고 펼쳐지는 칭찬의 말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고백하건대 나 또한 몇 번 참여한 적이 있으며 가슴 속에서 전혀 우러나오지 않는 호감의 문구들로 채웠기 때문인지 당첨도 된 적이 있다. 지금도 수많은 사이트 어딘가에선 그럴듯한 미끼를 내밀고 미래의 소비자들이 해당 상품에 대한 좋은 문구 하나쯤 써주길 유혹하는 페이지..
누굴 탓해야 할까. 무언가 잘못되어가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종종 비판할 대상을 찾는다. 때론 그 과녁이 틀리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답답한 마음을 풀어볼 요량으로, 혹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구차한 변명의 강조로 이 비난의 화살을 누군가를 향해 겨눈다. 기나긴 교육을 받고 자연스레 사회 안에 안착해야 할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 제자리를 못 찾거나, 비정규직이라는 위태로운 전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상황이다. 일찌감치 사회에 편입하는데 성공한 인생선배들은 그 원인이 스스로에게 있음을 깨달으라 거의 책망조로 그들을 타이른다. 능력에 비해 터무니 없이 높은 눈높이, 힘든 일을 회피하려는 경향 등을 지적하면서. 결국 20대, 더 나아가서는 머지않아 20대가 될 10대들의 이 밝지 않은 미래상은 전적으로 그..
가슴이 먹먹하다. 벚꽃과 함께 날려버린 그녀의 마지막 흔적이 여린 심장에 파고들어 따끔거린다. 뭐야, 이거.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평범한 듯 쿨한 소년과 시한부 인생의 미소녀가 서로 좋아해서 어쩔 줄 모르는 시시한 이야기는 안 봐도 뻔하다고 그렇게 스스로 당부했건만. 그러나 우습게도 어느새 나는 일본의 어느 마을에서 사춘기 시절을 보낸 소설 속 소년이 되어있었다. 단숨에 읽어 내려간 책장의 어디쯤에서부터 그런 생각이 시작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분명 이건 내가 상상했던 그 이야기가 맞는데. 안 봐도 독자의 손바닥 안일 것 같았던. 그렇다. 카타야마 쿄이치의 틴에이저 러브스토리, 는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게 기억되는 그때의 소중한 순간을 가슴에 아로새기기 위해 여러 가지 관습적인 소재들을 끌어 모은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다 읽고 난 직후 미국의 금융위기 뉴스가 들려왔다. 이거 참 묘한 타이밍이다. 전세계 시장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 거대한 나라의 휘청거림은 결코 그 국내에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가 흔들거리고 있다. 혹자는 이것이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가 실패한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경제란 워낙 여러 가지 변수가 맞물려있는 분야여서 단순하게 해석할 수 없는 대상이지만, 조건 없는 자유무역과 규제완화를 부르짖던 미국이 공적인 손이 필요한 구제금융의 필요성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은 참 아이러니하다. 과연 그들이 부르짖던 무한경쟁과 무한자유의 세계는 유토피아에 좀 더 가까운 모습이었을까. 여기에 이 물음에 대한 절대적 답안은 아니지만 무척 흥미롭고 설득력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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