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은 언제나 한가지 감상만을 낳는다. 그것은 독자가 등장인물 어디쯤을 방황하다 의혹의 눈길을 둬버린 용의자에 대한 기억이다. 말하자면 밝혀진 범인과 읽는 이가 찍어뒀던 용의자 사이의 차이만이 뚜렷이 남을 뿐이랄까. 그가 범인이었던가? 아니다, 그 사건은 그가 범인이었어. 근데 어떤 사연이 있던 살인사건이었지? 이렇게 추리소설은 우리가 책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몇 가지 기억의 갈래 중 하나만을 남겨둔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여운에도 불구하고 추리소설은 재미있다. 인륜을 거스르는 범죄에 대한 두려움과 미지의 범인을 향한 두근거림, 그리고 실제범인과 상상의 용의자가 일치할 때의 쾌감이 추리소설을 읽는 흥미를 돋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에는 각자의 어두운 사연을 간직한 10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
저자에 따르면 몰입은 행복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칙센트미하이는 인간은 대개 자신의 행복 정도를 속이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것이 어려우며, 따라서 한 시간이 일분으로 느껴질 정도의 정직한 몰입만이 우리 삶을 풍족하게 해 줄 것이라 주장한다. 그것은 몰입이 철저히 주관적인 영역임과 동시에 자신이 무언가에 빠져있다는 사실 자체를 외부에서도 명확히 판단 가능한 단 하나의 척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의 내용은 이런 몰입의 행위를 일 뿐만 아니라, 공부, 취미, 여가활동, 심지어는 우리 생활의 사소한 부분 하나 하나에까지 적용하기를 권하는 것이 전부다. 다시 말하면 ‘매사에 최선을 다해 정신을 쏟으라’는 얘기다. 칙센트미하이의 메시지는 분명 의미 있는 것이지만 한편으론 너무나 명확한 얘기를 애..
CNN에서 방송되는 래리 킹의 쇼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경우는 거의 없다. 케이블 채널에서 마이클 무어가 에 대해 말하기 위해 나왔던 편 정도가 가장 최근에 그의 토크쇼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유일한 경우다. 당연히 CNN에서 직접 본 것은 아니고 친절한 한글 자막과 함께 틀어주던 케이블 방송이었다. 영어 리스닝에도 취약할 뿐만 아니라 CNN의 방송편성시간도 제대로 모르는 내가 그의 방송을 챙겨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래리 킹의 명성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아마도 그는 오프라 윈프리와 함께 가장 유명한 토크쇼 진행자 중 한 사람일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가 사람들의 따뜻한 감성을 파고 드는 전략을 쓴다면, 래리 킹은 마치 토론 프로의 사회자처럼 중립을 지키며 게스트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 물어본..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세기에 언어라는 강력한 도구로 재건축한 중세의 모습은 현재와 다른 패러다임 속을 걷는 미지의 세계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 시기의 철학, 신학적 쟁점들을 에 쏟아 놓았다. 그것도 미스터리라는 가장 강력한 매혹의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작가의 상상력이 고스란히 독자의 뇌리에 남을 수 있는 효능을 발휘하도록 말이다. 멜크의 아드소와 그의 스승인 배스커빌의 윌리엄은 14세기 이탈리아의 어느 수도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통해, 이렇게 중세의 이야기 한 조각을 우리에게 전한다. 철학이 신학에 종속되어 인간의 이성을 새장에 가둬두었던 속 중세는, 불변의 진리가 인간의 손에 의해 확정된 시대였다. 성서의 해석을 두고 논쟁과 반목을 일삼던 세력들이, 실은 세속의 권력을 신의 ..
은 저자(著者)를 떠난 책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의 인생에 관여하는 지에 관한 짧은 이야기다. 책 속 ‘나’의 동료인 블루마 레논은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을 막 사서 읽다가 차에 치였고, 주인공의 친구를 비롯한 몇몇 주변인들도 떨어진 백과사전에 머리를 맞아 반신불수가 되거나 구석의 책을 꺼내려다 다리를 부러뜨리거나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슬프면서도 상상이라 생각하면 왠지 우스운 이 일화들을 보여주는 것보다, 책의 ‘무서움’, 그러니까 그것들이 인간의 일생에 미치는 ‘영향력’에서 오는 일종의 ‘두려움’을 설명하기란 더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책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운명이 좌우된 그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책의 우산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그 사실을 새삼 깨닫는 것은 왠지 낯설다. 인간이 성장하면서 신념..
문학 그 자체가 아니라 문학작품에 대한 글을 읽는 것은 언뜻 유쾌하지 않은 일 같기도 하다. 그것은 그 대상으로부터 독자가 받을 수많은 감상 중 몇 가지를 미리 정해놓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에 대한 감상은 온전히 수용하는 자의 몫이 된다. 문학작품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감상의 수, 즉 그 ‘경우의 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수 만큼이다. 우리 개개인은 얼마나 다양한 감정과 경험을 지니고 있는가. 작품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결국 개개인의 고유한 감정과 경험에 바탕을 둔다. 고로 작품의 해설서를 읽는다는 것은 우리의 수많은 가능성을 미리 가지치기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떨지. 앞의 문제가 결국 ‘미리 말해진 것의 권위’를 앞서 인정하기에 발생하는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