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간여행은 분명 흥미로운 소재거리이긴 하지만, 너무나 흔히 사용되어 ‘잘 다뤄도 본전’인 경우가 많다. 게다가 이미 나 시리즈 같은, 시간의 불역(不易)성을 ‘훌륭히’ 깨부순 영화들이 있는 이상, 앞의 얘기는 더욱 진실에 가깝다. 그럼에도 은 과감히 이 소재를 가져다 쓴다. 그것도 별스런 기계장치나 괴짜 과학자 하나 없이 ‘옷’ 한 벌을 이용해서 말이다. 이 말은 결국 이 애초에 단단히 엮인 사건의 인과관계나 그럴듯한 과학적 가설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는 얘기다. 에서의 시간여행이 여전히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라는 테마에 얹혀있긴 하나, 그 자체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관객에게 끊임없이 던져주는 감성이, 무엇인가 일어날 것 같은 긴장감..
1327년 겨울, 북부 이탈리아의 어느 외딴 수도원. 노년의 수도사는 젊은 시절의 자신이 그곳에서 겪었던 끔찍한 일화를 회상한다. 젊은 수도사 아드소(크리스찬 슬레이터)와 그의 스승 윌리엄(숀 코너리)은, 프란체스코파와 교황 측 간의 청빈에 관한 논쟁을 풀 만남을 위해 이 수도원에 온다. 이 둘은 다른 이들에 비해 먼저 수도원에 도착하지만, 그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내용과 관련하여 수도사들이 하나 둘 죽어 나가는 현장을 보게 된다. 과연 이 것은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신의 계시일까, 아니면 신의 사랑을 질투하는 악마의 소행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 수도원 내의 누군가가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것일까. 윌리엄과 아드소의 추리에도 불구하고 살인사건은 계속된다. 움베르토 에코의 방대한 중세의 기록이 영화로 다시 ..
오지 오스본은 어쩌면 대운(大運)을 상징하는 태몽을 가지고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가 이 뮤직 비즈니스에서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는 이유로 단순한 운이 아닌, 뮤지션으로서 그 자신의 오리지널리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적잖은 악재 속에서도 뛰어난 기타리스트들을 만나고 히트곡들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바라보자면, 이건 하늘이 준 행운이 그를 뒤따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가능할 정도다. 헤비메틀의 기념비적 기타리스트인 토니 아이오미를 만나 예의 그 ‘저주스런’ 목소리로 어둠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팀에서 나와 약물과 음주로 방황하다가도, 좌청룡 우백호에 비유할 수 있는 특급 연주자들을 언제나 옆에 두었던 인물. 이제는 귀여운(?) 할아버지의 얼굴이 되어버린 이 어둠의 황제는, 그렇게 신..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세기에 언어라는 강력한 도구로 재건축한 중세의 모습은 현재와 다른 패러다임 속을 걷는 미지의 세계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 시기의 철학, 신학적 쟁점들을 에 쏟아 놓았다. 그것도 미스터리라는 가장 강력한 매혹의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작가의 상상력이 고스란히 독자의 뇌리에 남을 수 있는 효능을 발휘하도록 말이다. 멜크의 아드소와 그의 스승인 배스커빌의 윌리엄은 14세기 이탈리아의 어느 수도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통해, 이렇게 중세의 이야기 한 조각을 우리에게 전한다. 철학이 신학에 종속되어 인간의 이성을 새장에 가둬두었던 속 중세는, 불변의 진리가 인간의 손에 의해 확정된 시대였다. 성서의 해석을 두고 논쟁과 반목을 일삼던 세력들이, 실은 세속의 권력을 신의 ..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롤플레잉 게임이라면 모를까, 판타지 장르를 영화로 만난다는 것이 썩 즐거운 일은 아니다. 창작자의 상상력에 완전히 의존하는 이 세계에 온전히 빠져든다는 것은, 그것에 직접 참여하는 행위가 아니라면 거의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나처럼 상상력의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다시 말하면,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화면에 보여지는 그대로 믿는 태도가 이 판타지 장르를 관람하는 올바른 자세다. 영화 가 나에게 판타지 영화로서가 아니라 다른 부분을 통해 인상을 심어주는 것도 그 이유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 이야기에 빠져들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의 이야기, 즉 청년 트리스탄(찰리 콕스)이 하늘에서 떨어진 별 이베인(클레어 데인즈)..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사정은 넉넉지 않아도 존 퀸시 아치볼드(덴젤 워싱턴)의 가족은 행복하다. 언제나 남편을 믿어주는 아내와 바디빌더가 꿈인 어린 아들이 집안을 환히 비춰주기 때문이다. 이 단란한 가정의 상황은 야구경기 도중 아들의 갑작스런 심장이상만 없었더라면, 적어도 불행의 냄새가 풍겨오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건강해 보이던 아들은 쓰러졌는데 믿었던 보험은 보장이 되질 않고, 국가의 보조는 받을 길이 없으며, 가장인 존 큐의 능력으론 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그 막대한 치료비용을 마련할 방도가 없다. 절벽에 홀로 선 아버지는 아들을 살려내기 위해 최후의 수단을 꺼내 든다. 합법적 불평등 앞에,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힘들어하는 아들의 모습뿐이다. 존 큐는 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