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무언가 큰 사고가 일어난 장소에서 회수된 비디오 테잎을 재생하면서 시작된다. 4월 27일의 아침을 알리는 비디오의 처음부분은 롭(마이클 스탈-데이빗)이라는 청년과 그의 연인인듯한 베스(오데뜨 유스트만)의 행복한 모습을 담고 있다. 테잎은 갑자기 시간을 건너 뛰어 5월 22일을 가리킨다. 롭의 동생 제이슨과 그의 여자친구 릴리는 롭을 위한 송별파티를 준비중이다. 제이슨이 촬영하던 캠코더는 롭의 친구 허드(T.J. 밀러)에게 쥐어지고 그는 파티 참석자들이 일본지사로 발령받아 떠나는 롭에게 남기는 인사말들을 기록한다. 롭이 도착하고 파티는 계속되지만 연이어 베스가 다른 남자와 함께 도착하면서 두 사람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진다. 비디오에 기록되지 않은 약 한달 간의 기간 동안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
* 스포일러 포함 일개 관객으로서 너무나 쉽게 결론 내리는 느낌도 들지만, 어쨌든 길예르모 델 토로의 는 얼핏 그의 이전 작품 를 연상시킨다. 두 작품엔 일단 인류를 구원 또는 보호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본질적으로 스스로가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일 수 밖에 없는 주인공들이 있다. 악마인 헬보이와 뱀파이어인 블레이드. 이 어둠의 영웅들은 선과 악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운명을 타고난다. 또 하나, 두 영화는 이른바 지하세계의 왕족이 자신의 종족을 배신하고 영화의 메인 악당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도 닮아있다. 의 노막이나 의 누아다 왕자 모두 자신들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주인공에게 대항한다(재미있게도 노막과 누아다는 같은 배우(루크 고스)가 연기한다). 그래서인지 누아다의 등장은 은근히 노막의 첫 등장을 떠..
스스로를 돌아보면 확실히 끈기가 있는 성격은 아니다. 특히나 싫증을 잘 내는 스타일이라 무슨 일, 어느 사물, 어떤 사람에게든지 꾸준한 관심을 주는 경험은 거의 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뒤늦게 후회할 일도 꽤 많았던 것 같다. 특히나 사람인 경우엔 더욱. 대상이 음악이라 해도 크게 다르진 않다. 그나마 CD플레이어를 가지고 다니던 시절에는 휴대한 몇 장의 CD를 하루 종일 듣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지만, 지금처럼 엄청난 양의 음악파일을 저장할 수 있는 MP3P의 시대라면 한 곡의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다른 폴더의 노래를 검색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새삼 선택 받지 못한 CD속 숨겨진 명곡을 찾자는 얘기는 아니고, 그만큼 한 곡에 ‘삘’ 꽂혀 올인하는 경험이 줄어들었다는 ..
는 이미 고담시의 압도적인 분위기를 훨씬 웃도는 거대한 명성을 순식간에 얻어냈다. 직업적인 평론가건 단순한 영화광이건 배트맨의 골수팬이건 간에 누구든 서로 앞다투어 이 작품을 칭송하는데 여념이 없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아마도 이 작품 이후 어떤 영화를 만들든지 와 비교될 수 밖에 없는 감독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조금 비관적으로 묻자면, 자칫 그의 필모그래프의 꼭지점이 여기에서 멈출 수도 있다는 우려 섞인 대답이 나온다. 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가. 황홀한 영광 뒤에 따라올 무지막지한 기대감. 공교롭게도 나는 이미 수많은 소식들을 접하고 기대감에 들뜬 상태에서 를 감상한 셈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소문난 잔칫집에 먹을 것 없다더라’는 말은 적어도 이 검은 박쥐 날개를 펼치고 마천루를 횡단하는 ..
하마터면 목에서 피를 볼 것만 같은 두려움에 아침마다 면도날을 사용하기가 망설여진다. 벌써 수년째 해오던 일인데다 지금껏 그런 불상사는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요즘은 자꾸 불길한 상상이 든다. 그것뿐인가.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왜 하필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도착해서야 현관문을 잠갔는지 아닌지 헛갈리는 걸까. 열쇠를 든 모습은 기억나지만 문을 잠그는 순간만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조개 껍질 속 조갯살 빼먹듯 누군가가 내 기억의 그 부분만 쏙 빼먹은 느낌이다. 밤이면 불편한 증세가 하나 더 튀어나온다. 눈을 감으면 곧바로 꿈나라로 가야 하건만 어찌된 일인지 잠에 빠져들기 직전에 어떤 형상이 기괴한 다른 것으로 변하는 것을 상상하게 된다. 주위가 고요하면 이런 증세는 더욱 심해지는데, 그래서 자기 전..
조그마한 에너자이저 북라이트를 받았다. 사실 이걸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얻은 물건이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북라이트라 부른단다. 어느 집이나 그렇듯이 집에 스탠드가 몇 대씩 있기 때문에 과연 이 북라이트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귀찮음의 본성을 내재한 인간에게 뭐든지 간편할수록 좋은 것은 당연한 이치. 잠들기 전 잠자리에서 책을 보고 싶을 때 책상 위의 스탠드를 옮기기 싫거나 그나마 머리맡에 설치된 전등조차 손대기 귀찮을 때, 아예 책에 붙여놓을 수 있는 북라이트가 이리도 요긴한 것을. 이러다 의 인간들처럼 나도 점점 퇴화되어 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자기전의 용도 외에 밤 중 고속버스를 타는 경우 책을 본다던가 할 때에도 눈 아픈 좌석 위 등보다는 북라이트가 더 좋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