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어두침침한 기억을 되살려 보자면 그땐 점심시간마다 방송반이 틀어주던 음악이 있었다. 선곡의 폭은 의외로 넓었다. 가요가 대부분이었지만 팝도 있었고 간혹 클래식도 들렸던 것 같다. 90년대였던 만큼 너바나나 펄잼 같은 그런지 밴드의 음악도 스피커를 통해 간간이 흘러나왔다. 단 유독 메틀은 듣기 힘들었다. 그래서 당시 방송반에 소속되어있던 한 친구에게 이 노래를 조심스럽게 신청했다. 바로 AC/DC의 ‘Back In Black’. 인트로를 듣던 친구는 어디서 많이 듣던 기타리프에 미소지었다(조작된 내 기억으론 그렇다). 아마도 서태지의 영향이었으리라. 그러나 브라이언 존슨의 쇳소리가 들려오자 금새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왜곡된 내 기억으론 그렇다). 결국 점심시간에 영 형제의 불세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내 문서 판독능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어렸을 때부터 텍스트를 읽고 요약이나 이런 걸 잘 못했던 것 같다. 독서라는 것이 하면 할수록 그 능력이 향상된다고 봤을 때 아무래도 그 원인은 턱없이 부족한 독서량일 것이다. 그래도 대학교 시절 도서관은 참 좋아했다. 일일이 읽지는 않았어도 왠지 책 냄새 가득한 그곳엘 가면 저절로 지혜가 깨우쳐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착각 혹은 어설픈 자기위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 책 몇 권을 골라놓고 앉으면 시간이 잘도 흘렀다는 사실이다. 졸린 눈으로 책상 앞에 앉아 간이베개로 쓰지 않았던 게 다행이다. 어쨌든 책에 대해 넘치진 않아도 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 한 예로 아무리 편리한 도구들이 많이 나와도 휴대용기기를..
영화는 전체 러닝타임의 처음 3분의 1을 이렇다 할 대사 없이 진행한다. 그나마 등장하는 대사는 월리(월-E)와 이브의 통성명 정도로 나머지는 모두 캐릭터의 몸짓과 감정을 표현하는 로봇의 기계음으로 묘사된다. 그 동안 하나의 거대한 쓰레기 덩이가 되어버린 지구의 황량함이 월리를 쓰레기 더미 가운데 한 점으로 보이게 하는 부감시점과 묵시록에 어울릴만한 음악을 통해 드러난다. 생명체라곤 이 쓰레기 처리 로봇을 졸졸 따라다니는 바퀴벌레 한 마리뿐인 이 외로운 지역에 바로 월리의 아지트가 있다.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습득한 아이템들을 하나 둘 선반에 진열하는 모습은 로봇 월리를 흡사 희귀품을 수집하는 인간처럼 보이게 한다. 더구나 뮤지컬 속 사랑을 속삭이는 노래에 감동하는 월리. 웬만한 인간보다 감상..
자기계발 관련 서적들은 대개 인간의 자기암시를 다룬다. 우리가 삶을 꾸려가는 순간순간 강한 암시를 통해 결국 긍정적인 마인드로의 복귀를 촉구하는 것이다. 다만 각 책들은 그 주제가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과정에 어떤 어휘와 소재가 첨가되는가가 다를 뿐이다. 최근 수 년 동안 각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빼곡히 자리잡은 이 비슷비슷한 책들은 하나의 주제를 누가 더 그럴듯하게 이야기하는지를 경쟁한다. 도 그 중 하나로서 역시 자기암시를 도구로 삼아 독자로 하여금 인생의 순로를 찾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는 성공적인 사업가로 살고 있는 주인공 존이 자신의 인생에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에게 도움이 될만한 강의를 찾아 다닌다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1분 멘토’라 불리며 학생들이 스스로..
* 스포일러 포함 M. 나이트 샤말란의 은 영웅과 악당의 상관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고찰을 담고 있다. 잘 생각해보자, 히어로물의 주인공들은 결코 빵 훔치는 소년이나 신용금고를 털려다 여직원에게 붙잡히고 마는 소심한 강도를 응징하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 이들은 핵융합 기술로 인류를 위협하는 미친 과학자나 온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 계획을 가진 싸이코패스, 혹은 영웅과 거의 동등한 능력을 가져 그 힘을 과시하기에 여념이 없는 자아도취 정신병자들을 처치하기 위해 그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영웅의 출현은 악당의 존재와 맞물려 이루어진다. 즉 거대한 위협으로 다가오는 악당이 없으면 놀라운 능력을 가진 영웅도 볼 수 없다는 얘기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문제 혹은 끝없이 반복되는 뫼비우스의 띠와도 유..
일개 관객으로서 3D 애니메이션의 기술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영화잡지나 관련 사이트 등을 통해 단편적인 지식을 접할 뿐으로, 관심 있는 부분이 아니어선지 그마저도 곧 잊히기 일쑤이다. 시리즈로 대변되는 초기 장편 작품들을 봤을 때 느꼈던 놀라움과 신기함, 에서 섬세하게 처리된 설리의 털 정도가 3D 애니메이션에 대한 인상 깊은 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애니메이션의 이 한 형태가 하나의 장르로 완전히 자리를 잡은 후에는 당연히 여느 영화를 대할 때와 비슷하게 그 외형적인 매력보다는 안에 담긴 내용이 무엇인지에 더 집중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전통적인 동화세상에 대해 발랄한 전복을 꾀했던 시리즈를 좋아했고 탄탄한 내러티브 속에 큰 웃음을 간직한 브래드 버드의 작품들을 재미있게 감상했..